▲ 고령화 가족| 천명관 저| 문학동네| 2010년 02월
고요한 못에 내던져진 나뭇잎 한 장이 일으킨 파문은 때론 예견된 해일보다 크게 느껴지곤 합니다. ‘고령화 사회’는 이미 상투적이 돼버린 예견된 인구론적 해일이죠. 반면 가족의 위기론은 현실적입니다.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그곳, 바로 그곳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전·현직 검사장이 연루된 ‘법조 비리’ 사건보다 남의 가족사가 대중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몇십억 몇백억의 건물과 주식이 오가는 ‘비현실적’인 현실보다는 우리에겐 타인의 가족사가 더 흥미롭죠. 아니 오히려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100세 시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살아가는 데는 예외가 더 많습니다. 젊은 날 결혼해 평생을 하나의 가족을 굳건히 지키며 반세기 넘는 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적어도 통계상으로 나타나는 가족의 붕괴를 보고 있노라면 이는 오히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고령화 가족』은 이토록 혼란스러운 오늘날의 가족에 대한 정의를 묻고 이에 답하는 소설입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족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런 가족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이야기죠. 어느 가족이나 있을 법한 문제아들을 모아 하나의 가족을 만들어 놓고 보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막장 가족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야기는 가족의 둘째 인모의 관점으로 전개됩니다. 인모는 꽤 그럴듯한 이름의 대학 출신이지만 첫 영화를 말아먹어 충무로에서 용도 폐기된 감독이죠. 아내마저도 불륜으로 떠나버려 길거리에 나 앉기 직전입니다. 그가 엄마의 ‘닭죽 먹으러 올래?’라는 한마디에 엄마의 24평짜리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죠.

  먼저 집에 똬리를 틀고 있는 첫째 한모는 더 심각합니다. 그는 일찌감치 엄마 집에 얹혀사는 중입니다.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드는 전과 5범의 동네 깡패. 하지만 가족을 위해 중요한 순간마다 자신을 희생하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죠.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여동생 미연까지 고등학생 딸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면서 집은 북적입니다. 더 엄청난 출생의 비밀을 서로 모른 채.

  이 가족에겐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관념으로 가족이라고 묶을 수 있는 조건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가족을 이끌었던 남성은 소설 속 처참할 정도로 무력합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할 아버지는 이미 세상에 없죠. 장남은 백수건달, 차남은 인생의 벼랑 끝에 몰린 실패한 영화감독.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가족을 지키는 것은 어머니입니다. 동네에서 화장품 방문판매를 하며 생계를 유지해나가며 자식들에게 매일 고기를 구워 먹이는 것도 어머니죠. 매일 티격태격 싸우는 이들을 뜯어말리는 중재자도 어머니입니다.

  한국 고유의 배타적 순혈주의의 공고함도 무너집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적용할 수 없는 꼬일 대로 꼬인 혈연관계가 펼쳐지죠. 배다른 형제, 아버지 다른 자매, 이혼, 재혼. 뒤틀리고 뒤틀린 이 가족의 이야기에서 끈적한 핏줄보단 의리가 우선입니다. 다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조건으로 가출한 미연의 딸을 찾는 것도, 인모의 폭력 전과로 대신 감옥에 갔다 오는 이는 핏줄과는 별 관계없던 한모죠.

  가족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족’은 언젠간 교과서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르죠. 우리는 이제 가족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 정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가족을 지키는 건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아니라 따뜻한 모성애라고, 혈연 아닌 의리라고, 가족은 식구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이 모든 전환은 가족이란 말의 종언을 고하고 있습니다. 먼 훗날 그 자리는 이제 ‘가족적’이라는 형용만이 대체하는 거죠. 가족 사이처럼 어떤 친밀한 어떤 사이를 뜻하는 수식어만이 남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말입니다. ‘가족적(家族的):과거에 인류가 오랫동안 유지했던 기본적 집단. 그리고 그 집단처럼 친밀한 사이 또는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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