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의자와 마주하게 된다. 편집국은 고요했다. 6명이 2년여의 학보사 임기를 끝내고 2명이 개인적인 이유로 편집국을 떠났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야 굳이 새로울 것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허나 지나간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편집국을 떠난 그 수많은 기자 중 어떤 이는 “신문을 만든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업(業)을 쌓는 과정”이라는 꽤 그럴듯한 말을 남겼다. 그는 편집국에서 7년을 일한 선배다. 오래된 말이지만 요즈음 그 의미를 다시금 되새김질하곤 한다. 이만큼이나 신문 제작에 대한 적절한 비유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 어떤 행위는 반드시 그에 걸맞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불교의 업보다. 업에는 세 종류가 있다. 생각으로 짓는 의업(意業), 말로 짓는 구업(口業),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 언론이 생각하고, 말하고, 내놓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퍽 들어맞는 비유다.

  문제는 우리가 행한 업들은 꼭 그만큼의 보(報)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번학기 중대신문이 내놓는 열한 번의 신문에 대해서도 숱한 비판이 이어질 것이다. 폐부를 찌르는 비수와 같은 비판도, 때론 비웃음 섞인 조롱과 비아냥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오롯이 내게 더 거세게 불어닥칠 것이다.

  피할 수 있을까. 애초에 말하지 않는 게 업보를 피하는 방법이라는 교리는 언뜻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말이다. 잊어서는 안 될 게 있다. 묵언수행은 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말하기 위해 하는 수행이라는 사실 말이다. 조금이라도 잘못 말하면 그 말을 믿고 온 사람들의 삶이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한 것이다. 그러니 조심스럽게 말하고, 제대로 말하라는 것이다.

  조심스럽지만 제대로 말해야 한다. 이번학기 대학보도부는 그동안 말하고 싶었던 것을 제대로 말해볼 참이다. 실현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매주 중대신문의 논점을 담은 기획기사를 준비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중앙대, 그리고 대학사회에서 그동안 말하고 싶었던 것을 자유롭게 말할 것이다.

  심층기획부는 깊이 감춰져 있던 것들을 말할 계획이다. 사라진 내면의 자존감, 스멀스멀 피어올라 들끓고 있는 혐오라는 감정 등의 기저를 파헤칠 것이다. 학술문화부는 고전적인 학술부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지면을 구성했다. ‘교수님과 강의실 밖 산책’은 수동적인 학문 탐구방식에서 벗어나 거창하게도 삶에 관해 이야기해 볼 생각이다. 여론부는 열정,끼 잠재력 있는 청춘의 삶을 조명해보는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라는 지면을 새로 만들었다.

  잉크 냄새 채 마르지 않은 신문을 움켜쥐며 또 업을 쌓고 말았다는 무력감이 우리를 휘감을지 모른다. 업보라는 굴레의 인과법칙은 때론 마땅한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을 동반한다. 하지만 불확실한 세계에서 노력한 대가를 얻게 된다는 또 어느 정도의 안도감도 제공한다. 그렇게 1877번째 신문의 발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력감보다는 기대감을 갖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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