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관 프로야구 선수(사회체육학과 05학번)
  • 임지원 기자
  • 승인 2016.08.29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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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그러나 그는 결코 느리지 않다
눈으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150km’ 짜리 공이 날아다니는 이곳은 KBO 리그. 공의 빠르기가 투수의 역량을 결정하는 이곳에서 특이하게도 ‘느린 구속’으로 명성을 자랑하는 한 투수가 있다. 그의 직구 속도는 고작 ‘130km’, 최저 구속대는 무려 ‘70km’다. 그런데도 그는 국내 최고의 투수들이 모였다는 치열한 이곳에서 당당히 살아남았다. 바로 두산베어스의 유희관 선수다.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걸까. 타자들은 그의 느린 공에 헛방망이질을 해댄다.
 
 

화려함, 그 이면에
얼룩진 땀 자국
 
느리지만 치밀하기에
부끄럽지 않다
 
무덥고 한적한 8월의 오후에 잠실야구장을 찾았다. 곳곳에 널브러진 응원봉만이 엊저녁의 환희를 방증하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중앙출입구 앞 하염없이 앉아있는 이들은 간혹 나타나는 선수를 보기 위해서라 했다. 만나기로 한 유희관 선수가 나타나면 이들의 부러운 눈총을 받으며 중앙출입구로 들어가야겠다고 다짐했건만 그는 에어컨 빵빵한 실내에서 기자를 맞이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꽉 끼는 두산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채로.
 
  -만나서 영광이다. 잘생겼다.
  “저 잘생겼다는 말이 제일 싫어요. 놀리는 거잖아요. 아닌거 알아요.”
 
  -실물이 훨씬 나은 것 같다.
  “아, 그런 말은 좀 들어요.(웃음) 아무래도 TV에선 더 뚱뚱하게 나와서 말이죠.”
 
  -인터뷰를 준비하다 재밌는 걸 봤다. 본인 별명에 대해 아시나.
  “당연히 알죠. 유희왕, 올라프, 지옥에서 데려온 모닥불러, 바나나우유….”
 
  -올라프는 정말 닮았다. 그런데 바나나우유라니.
  “제 몸매가 바나나우유 통 같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뱃살이 좀 나와서요.”
 
  -(당황) 독보적으로 별명이 많은 것 같다.
  “그런 것도 저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하나하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오히려 제가 밋밋한 이미지였다면 관심이 없었을 텐데 재미있는 별명 많이 붙여주셔서 감사하죠. 아, 그중 유희왕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제 이름이랑 비슷해서 붙여주신 것 같은데 일단 ‘왕’ 자가 ‘최고’라는 의미잖아요.(웃음)”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시작하겠다. 우선 4년 연속 10승을 축하한다.
  “에이, 고마워요. 사실 지난 몇 경기 동안은 성적이 부진해서 걱정이 많았어요. 정말 이런 게 아홉수인가 싶을 정도로 잘 안 풀리더라고요. 가만있어봐, 제 나이도 29고 등 번호도 29번에다가….”
 
  -힘들게 거머쥔 10승이니만큼 굉장히 기쁠 것 같다.
  “만감이 교차했어요. 경기일이 마침 ‘유희관 데이’라고 저를 응원해주시는 날이었거든요. 제가 데뷔 첫 우승했을 당시 영상이 저 커다란 전광판에 나오는 거예요. 그때 ‘아, 지금 이렇게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다’ 싶었어요.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의미 있는 1승이었다고 생각해요.”
 
  유희관. 정말 유희‘왕’ 답게 역대 두산베어스 좌완투수 역사상 최초로 4년 연속 10승을 이뤄낸 선수다. 아무리 구속보단 제구력으로 승부한다지만 지난 2일 연속 10승을 달성한 경기에서도 최고 구속은 134km에 불과했다. 그가 던진 공은 거의 달팽이 수준이다.
 
  -원래 공이 느렸나.
  “네. ‘느린 공으로 허점을 찔러야겠다’는 전략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원래 느렸어요. 중앙대 입학 당시 스무 살이면 가장 힘쓸 나이잖아요? 근데 막상 학교에 와보니 다른 투수들에 비해 구속이 너무 안 나오는 거예요. ‘난 왜 이렇게 공이 느릴까. 좀더 빨랐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자책도 했었죠.”
 
  -속도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아니요, 더 이상 속도를 올리려 노력하는 것은 관뒀어요. 어차피 안 되는 거 재빨리 다른 장점을 찾기로 했죠.”
 
  -다른 장점은 뭐였나.
  “저는 속도는 느렸지만 공 컨트롤은 좋았어요. 그래서 컨트롤을 더 정교하게 가다듬어야겠다는 생각을 일찌감치 했죠. 단점을 장점으로 극복하기보단 장점을 더 큰 장점으로 극대화해야겠다고요. 구속이 안 나와서 아쉽긴 했지만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는 놓쳤을 거예요.”
 
  -컨트롤을 단련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야구 일기를 썼어요. 컨트롤을 단련하려면 상대 타자를 분석하고 경기를 운영해나갈 줄 알아야 하는데 사실 하룻밤만 지나도 자세한 경기상황을 잊어먹기 마련이거든요. 당시 코치님의 강조 하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기를 썼죠.”
 
  -야구일 거라, 어떤 내용인가.
  “몇월 몇일에 누구랑 경기했고 어떤 상황이었는지 최대한 자세히 기록했어요. 좋았던 점과 부족했던 점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 거죠.”
 
  -만약 컨트롤이 아닌 속도를 올리려 했다면.
  “단언컨대,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없을 거예요. 속도가 안 나오는 건 신체적인 문제였는지 잘 고쳐지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컨트롤, 즉 제구력을 향상하는데 전력을 쏟아 경쟁우위를 확보할 수 있던거죠. 비록 공은 많이 느리지만 지금 컨트롤투수로서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안 그런가요. 저, 유희관이에요.”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지금도 야구 일기를 쓰나.
  “전혀요. 전문적으로 철저히 분석해주시는 전력분석팀이 따로 계셔서요.(웃음) 하지만 여전히 타자의 성향을 분석하고 대비하는 일은 늦추지 않죠. 그게 제 무기니까요.”
 
  원래 그냥 그저 그런 선수였다. 키도 작고, 발도 느리고. 공도 느리고. 매일같이 자기 자신을 바보 같다고 책망했던 그는 중앙대에 와서부터 변했다. 여전히 공은 느렸지만 차츰 컨트롤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 그는 좌완 에이스로서 빠른 속도로 성장해 나갔고 급기야는 2007년 야구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됐다. 이후 2009년 졸업과 함께 두산베어스에 입단한다.
 
  -2009년 두산베어스에 입단했다. 원래 가고 싶은 팀이 있었나.
  “딱히요? 어디든 절 뽑아만 주신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웃음)”
 
  -하지만 두산베어스에 입단한 첫해에 이어 이듬해까지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부실했죠. 아마 2010년엔 불과 5경기에 출전해 승패 없이 방어율 10.80을 기록했을 거예요. 지독하게도 잘 풀리지 않았었죠.”
 
  -기회가 없어서였나.
  “돌이켜보면 기회가 없었다기보단 제가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프로야구에 와서도 결국 하는 건 어려서부터 했던 바로 그 야구인데, 뭐가 다르다고 괜스레 겁을 먹었어요. 투수는 타자랑 싸워야 하는데 전 저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져서 기회를 잡지 못한 거죠. 바보 같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
  “군대에 갔어요. 신의 한 수였죠. 제 첫 번째 터닝포인트가 중앙대라면 두 번째 터닝포인트는 상무야구단에 입대한 거예요.”
 
  -상무야구단 이후에 성적이 확 좋아졌다.
   “상무에선 프로 2군 선수들과 경기해요. 1군에서 내려온 선수들도 있죠. 그곳에서 선발로 뛰면서 쟁쟁한 선수들과 상대해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성적이 꽤 잘 나오는 거예요. ‘아 이런 선수들과 싸워도 내 공이 먹히는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겼죠. 당시 2012년 퓨처스리그에서 124이닝 11승 3패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했어요.”
 
  -덕분에 제대 후엔 여러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예. 떠나보냈던 애가 군대에 갔다 오더니 갑자기 잘던지는 투수가 돼 돌아온 꼴이죠. 그때부터 두산베어스도 제게 긍정적인 기대를 걸었어요. 저도 자신 있게 경기에 임하다 보니까 잘 풀려나간 것 같아요.”
 
  -복귀 후 2013년 5월 4일의 LG전을 빼놓을 수 없다.
  “프로 첫 승리였어요. 결코 빼놓을 수 없죠. 원래는 니퍼트 선수가 원래 선발 등판 예정이었는데 글쎄 담에 걸린 거예요. 엉겁결에 제가 대신 나가게 됐죠. 웬만해선 운이 좋았다고 잘 이야기하지 않는데, 이땐 정말 운이 좋았어요.”
 
  -어떻게 됐나.
  “팬 여러분들은 의아해했겠죠. 웬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무명선수가 나왔으니 당연히 질 줄 알았을 거예요. 근데 그 선수가 경기를 잘 이끌어 가니까 ‘저 선수는 누구지?’ 하며 관심을 주신 것 같아요. 결국 5.2이닝 동안 무실점 투구로 마무리 지었어요. 라이벌인 LG랑 했기 때문에 임팩트가 두 배였어요. 당시 두산베어스는 좌완 선발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무명이었던 제가 그날 승리투수가 되자 더욱 놀랐겠죠. 게다가 어린이날 더비였거든요.”
 
  -최고의 조건이다.
  “지금도 니퍼트한테 ‘네가 날 살렸다’고 우스갯소리를 해요. 니퍼트는 원체 성품이 좋아서 ‘네가 잘해서 그런 거다’라고 말해주긴 하지만요.”
 
  느리다, 느리다, 느리다…. 수없이 들어왔던 말이기에 그 스트레스가 상당할 것이다. 아무리 제구력이 좋다 한들 전략을 간파당하면 무용지물이라는 말까지. 느린 공으로 주목받았지만 느리기 때문에 ‘반짝’하고 사라질 투수라는 가혹한 평가를 매 시즌 받아왔다. 하지만 틀렸다. 벌써 프로야구 4시즌째, 그의 공은 변함없이 위력적이다. 어느새 유희관은 연봉 4억원을 받는 정상급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더이상 그는 그 누구보다 느린 투수가 아니다.
 
  -팀 내에 가장 절친한 분이 있다면.
  “원래 김현수 선수랑 가장 친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메이저리그로 가는 바람에 지금은 페이스톡으로만 열심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죠.”
 
  -미국서 활약하고 있는 김현수 선수처럼 본인도 더 큰 꿈을 가질 수 있지 않나.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생각은 없나.
  “에이, 현실적으로 힘들죠. 전 아직 FA가 되려면 오랜 기간이 남았고, 그때가 되면 제 나이 35살이에요. 한눈팔지 말고 우리나라에서라도 꾸준하게 잘하는 게 답이죠. 아, 한가지 이유가 더 있어요. 제가 한식을 좋아해서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안 나가는 거라고 해두죠.(웃음)”
 
  -알겠다.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나.
  “꼬박꼬박 잘 챙겨 먹어요. 그건 정말 중요한 일이죠. 러닝 같은 것도 하고 있긴 해요. 더운 날 체력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항상 최선을 다해 뛰려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면 투구나 발란스 부분에도 많은 도움이 돼요.”
 
  -자선 경기도 빠짐없이 참여한다고.
  “좋은 취지에서 하는 거면 언제든 참여하려고 노력해요. 12월이 되면 자선야구나 위문 등의 행사에 많이 다니려고 하죠. 그래서 어떤분이 제게 ‘두산의 박현빈’이라고 해주셨어요.(웃음) 아, 그중에서도 제가 꼭 챙겨가는 게 중앙대 소아암 어린이 돕기 행사예요. 취지 자체도 좋지만 우리 모교라서 더욱 매년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지난해 예능 ‘마리텔’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때 처음 운 좋게 예능을 해봤는데 기대 이상으로 많이들 좋아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그 뒤에도 섭외가 많이 들어왔지만 정중히 거절했어요. 너무 그런 쪽에만 치중한다고 보여지고 싶진 않아서요. 일단은 한번 경험해본 거로 만족하려고 합니다.(웃음)”

  -참 재미있게 하던데 아쉽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번은 나가서 재미있는 모습 보여드리고 올게요. 팬분들이 항상 야구하는 모습만 보고 싶어 하시진 않더라고요. 야구할땐 야구하는 모습, 그 밖에선 재미있는 모습도 중요하죠.”

  -입담이 좋아서 은퇴 후에 해설위원을 해도 좋을 것 같다.
  “당장 은퇴가 다가온 게 아니라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하면 잘할 것 같다고 많이들 말씀하시죠.(웃음)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이기도 해요. 그라운드에서 보는 야구에 대한 시각과 밖에서 해설위원으로 보는 야구에 대한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서요. 제삼자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제가 놓쳤던 부분도 잡아낼 수 있겠죠.”

  -두산베어스는 올 시즌 초부터 줄곧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앞으로의 각오 듣고 싶다.
  “모든 선수가 부상 없이 똘똘 뭉쳐진다면 또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우승했을 때 팬들과 하나 되어 축가를 부르는 그런 영광의 모습들도 이번 시즌에 다시 한 번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끝까지 열심히 한다면 마지막에도 웃을 수 있겠죠. 언제나 그랬듯이요.”
 
지난해 10월 31일 유희관선수가 한국시리즈 우승 기념으로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16일 동대문 두타 광장에서 우승기념 싸인회가 열렸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성장의 발판이자 돌아갈 집이었어요. 대학야구 시절 치열한 나날들을 함께 보내며 웃고 울었던 20대 초반 그 자체였죠. 놀기도 잘 놀고 먹기도 잘 먹어서 내리 삼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내리의 황태자’라고 불리기도 했어요. 저 모르면 간첩이었다고요.(웃음) 후배 여러분들도 충분히 즐기세요. 친구들과 좋은 추억도 많이 만드시고요. 다신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니까요. 멋진 대학생활 하시고 중앙인으로서 더 단단하고 떳떳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의에 죽고 참에 살아야죠.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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