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으로 바라보기’와 ‘사건 밖에서 팔짱끼기’는 다르다. 양쪽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겠다는, 그럴싸한 주장은 사실 ‘비겁한 변명’이다. 사건은 복잡다단 하고 개인이 항상 명확한 입장을 유지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멀찍이서 신선놀음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마침 “‘남혐’과 ‘여혐’으로 편 갈라 싸우지 마세요” 라는 말이 자주 보이기에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당신이 이 말을 하고 있다면 둘 중 하나이다. 세상이 평화롭지 않다는 것을 모를 만큼 순진하거나,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하거나.

  초등학교 시절, 영악할 만큼 영악해진 아이들의 문제를 대충 넘기려던 담임이 있었다. 반에서 인기 많고 싸움 잘하는 A는 항상 B를 괴롭혔다. 보이지 않는 학교 뒤뜰에서 때리거나 친구들에게 B와 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등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직간접적으로 A는 B를 괴롭혀왔다. 어느 날 B는 A에게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선언했다. A는 B가 괘씸해 주먹을 날렸고 B도 맞고 있을 순 없었기에 같이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싸움을 자주 해왔던 A에게 B의 저항은 쉽게 무너졌다.

  담임은 A와 B를 교무실에 세워놓고 말했다. “A가 많이 때린 것 같지만 B도 똑같이 주먹질을 했다는 점에서 서로 잘못했다. 그러니 둘이 악수하고 화해하고 사이좋게 지내.” 교무실에서 나오자마자 A는 B의 뒤통수를 갈겼다. A는 반 내에서의 주도권을 이용해 B를 더 치밀하게 괴롭히기 시작했고 B는 저항할 의지를 상실해버린다. 이것이 ‘맥락’이다. 아무리 담임이더라도 맥락까지 알아내 판단하고 행동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다만 그에게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선도할 책임이 있다. 말한다는 것은 책임이 따르고, 어떤 사건에 대해 논평한다는 것 또한 책임이 따른다.

  당신은 공평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고 믿는 세상이, 사실은 정말 불공평할 수 있다. 그런 불리한 위치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다면 배경과 맥락을 명확히 봐야 한다. 어렵지 않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권력을 학습해왔고 구조를 체득해왔기에 더 잘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남성이라면 온라인의 담론 너머 존재하는 현실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온라인 속 페미니즘의 언어에 대한 판단은 잠시 보류하자. 결국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건 현실이기에 허울 좋은 담론장인 인터넷상의 전쟁에 분노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어찌하여도 삶은 어차피 오답의 지뢰밭이다. 그렇기에 틀릴 수 있는 자유가 있고 그 기저에 바로 잡아낼 의무가 든든히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 편의 손을 과감히 들어준다는 것은 그래서 아름답다. 자신의 의견을 세우고 뒷받침하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 강해질 수 있다.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때로 어떤 강압에 입이 막히고 손이 붙들린다. 따라서 나는 이 지면을 통해 우리 모두의 ‘편들기’를 옹호하고자 한다. 더불어 ‘누구나’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거대한 원탁이 도래하길 기원해본다.
 
전명환 학생
국어국문학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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