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홍대 앞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 초창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행사로 성장했다. 사진출처 : 퀴어문화축제
차별과 억압의 역사에 맞서
세상 밖으로 당당히 행진하다
 
‘나 여기 있습니다.’ 퀴어인권운동의 핵심 슬로건이다. 이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방식으로 퀴어인권운동가들은 ‘퍼레이드’라는 방식을 택했다. 지난 24일 102관(약학대학 및 R&D센터) 401호에서 퀴어문화축제 한채윤 퍼레이드기획단장이 ‘퀴어퍼레이드를 중심으로 본 세계 퀴어운동의 역사와 현재’라는 주제의 강연을 진행했다.
 
  동성애, 차별의 역사가 시작되다
  고대 인류의 역사에서 ‘동성애’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존재할 필요도 없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현상 중 하나였다. 특히 서양에서는 동성애를 ‘그리스식 사랑’이라 일컬으며 세련된 사랑의 방식으로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기독교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이후 동성애에 대한 차별은 본격화된다. 당시 일부 기독교에선 인간의 원죄가 정액을 통해 전달된다는 이유로 ‘성행위’를 부정적으로 간주하면서 부부의 성관계 외에 모든 성행위를 범죄로 인식한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에도 그 흐름은 계속됐다. 대량의 노동자가 필요했던 국가는 계속해서 이성과의 결혼을 장려하며 동성애를 차별했다. 또한 ‘화장을 한 남성’, ‘보이시한 여성’을 사회 최하위층으로 낙인찍으며 노동자 등의 하층 계급을 위로하는 방식으로 동성애자들이 이용됐다.
 
  1869년 독일에서 ‘동성애자’란 단어가 처음 등장하면서 차별의 굴레를 벗기 위한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히틀러의 집권으로 퀴어인권운동은 다시금 위기를 맞는다. 히틀러는 형법175조를 강화해 세 사람의 증언만 있으면 동성애자에 대한 처벌이 가능하도록 개정했으며 레즈비언을 ‘사회 부적응자’라는 이유로 체포했다. 역사의 흐름이 그러했듯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퀴어인권운동 역시 미국으로 주 무대를 옮기게 됐다.
 
  스톤월 항쟁과 퍼레이드의 시작
  하지만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은 미국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동성애자를 공직에서 해고하도록 하는 행정법규에 서명했으며 미국정신의학회(APA)는 동성애를 치료받아야 할 질병으로 간주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메타친 협회’ 등 동성애 관련 잡지들은 ‘동성애자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피켓을 들고 길거리를 배회하면서 화장 한 남성들을 단속하는 등 부당함에 저항하기보다는 사회에 동화되고자 하는 모습이 강했다.
 
  1969년 6월, 퀴어인권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졌다. 뉴욕 맨해튼의 게이바였던 ‘스톤월 인’에서 성적소수자와 전투경찰 간의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일주일간 계속됐던 이번 충돌은 미국 전역으로 확대됐다. 사건이 발생한 지 2년 후 ‘크리스토퍼 거리’에서 스톤월 항쟁을 기념한 시가지 행진 행사가 열린다. 퀴어인권운동에서 퍼레이드가 최초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스톤월 항쟁 이후 퍼레이드는 퀴어인권운동의 상징이 된다. ‘나 여기 있습니다’, ‘나 자신이 자랑스럽습니다’ 등의 슬로건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퍼레이드가 채택된 것이다. 기존의 퀴어인권운동에 회의감을 느꼈던 사람들은 시가지를 걸으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곧 전 세계로 뻗어나가 1973년 영국, 1979년 독일 등에서도 본격적인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한국에선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퍼레이드가 등장했다. ‘한국퀴어문화축제’의 일환으로 계획된 퍼레이드는 초창기 인권단체들이 준비하는 작은 행사에 불과했지만 2003년 이후 축제에 관심이 있는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위원회를 구성하며 규모가 점차 커졌다. 그 결과 시작 당시 50명에 불과했던 퍼레이드는 2014년 1만5천여명이 참여하는 큰 행사로 발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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