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小醫)는 돈을 벌고 명예를 얻기 위해 병을 치료한다. 중의(中醫)는 병을 치료하지만 그 사람의 처지와 마음도 헤아려 병과 사람을 같이 치료한다. 대의(大醫)는 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기 때문에 대의가 치료하면 아무 환자도 생기지 않는다. 또한 대의가 치료하면 아무 치료도 없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의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지도 못 한다.’ 동작구에 위치한 오연상 박사(전 중앙대 의대 교수)의 의원 입구에 걸려있는 말이다. 오연상 박사는 1987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기여하고 의사로서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고자 꾸준히 한 길을 걸어왔다. 평생 한눈팔지 않고 의사로서 사명감으로 걸어온 그의 삶을 만나보았다.

 

▲ 사진 김다혜 기자
 
박종철 군에 대한 증언은
의사로서 해야 할 도리
 
이익과 위협이 공존할 때
자신 앞에 떳떳한 선택하길

1987114일 오전 1130. 평소와 다름없는 평일 오전 중앙대 병원 응급실로 세 명의 남자가 찾아왔다. ‘조사받던 사람이 위급하니 왕진을 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당시 신군부 정권이 치안을 이유로 사람들을 잡아들이던 악명 높은 조사 본부였다. 그곳에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폐인이 되거나 영영 되돌아오지 못하기도 했다. 당시 내과 전문의로 근무하던 오연상 박사는 왕진 가방을 챙겨들고 남영동 대공분실로 향했다.

  -당시 현장 상황은 어땠나.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어요. 입고 갔던 가운이 물에 다 젖을 정도였죠. 한쪽에는 한 청년이 속옷만 입은 채로 누워있었어요. 마치 물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있었죠.”
 
  -청년의 상태는 어땠나.
  “청진기를 갖다 대니 폐에서 수포 소리가 났어요. 안타깝게도 이미 사망한 상태라 가망이 없었죠. 30분간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결국 살아나지 못 했어요. 그런데 자꾸만 응급실로 옮기자는 거예요. ‘이건 뭔가 다른 의도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어떤 의도를 짐작했는지.
  “사망 장소를 대공분실이 아닌 응급실로 하고 싶은 거였겠죠. 특히 응급실로 가서 전기 충격을 가해보자는 말에서 이상함을 느꼈어요. 이전에 가한 전기 고문을 묻어버리려는 거구나. 좋지 않은 의도라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응급실장님에게 시체가 응급실로 들어가려고 하니 막아달라고 전화를 걸었어요.”
 
  -사인은 무엇이었나.
  “호흡곤란이었어요. 담당 조사관은 물을 많이 먹었다고 말했지만 그 정도면 물에 빠져 죽은 거나 다름없었죠. 직접 보진 못 했지만 정황상 심한 물고문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1987년 겨울, 서울대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스물세살 박종철 군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불법 조사를 받는다. 당시 수배자였던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박종운 군의 소재를 대라는 이유에서였다. 박종철 군의 사망을 두고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책상을 치니 갑자기 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라는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자신이 본 것을 고한 오연상 박사의 증언은 의심스러운 물고문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증언이 진실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1987년 12월 30일자 ‘동아일보’에서 오연상 박사는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사진제공 오연상 박사
  “직접 본 것은 아니기에 물고문이 있었다고 확언할 순 없었지만 심증이 강하게 드는 상황에서 어떻게 말할지 많이 고민했죠. 일부러 물에 대한 얘기를 많이 꺼냈어요. 한 대여섯번 했을 거예요. ‘바닥에 물이 흥건했고, 박종철 군의 온몸이 물에 젖어 있었고, 폐에서 수포 소리가 들렸다고요. 모두 제가 본 사실 그대로였어요.”
 
  -사실대로 말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렇죠. 곧이곧대로 말해봤자 어차피 금방 묻힐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대부분 다른 사람들도 적당히 넘어가거나 대공분실 쪽에서 원하는 대로 얘기하라고들 했죠.”
 
  -정권으로부터 압박도 받았나.
  “그런 것도 많았죠. 검안을 다녀온 후로 귀찮게 하는 사람이 많을 거다. 신경 쓰이지 않게 도와주겠다며 병원에 형사들이 찾아왔어요. 말이 그렇지 결국 진료실 앞에 앉아서 종일 저를 감시하는 거였죠.(웃음)”
 
  -그런 가운데 진실을 말하기까지 내적 갈등이 심했을 것 같다.
  “사실 판단하기가 쉽진 않았어요. 하지만 외부로부터의 위협보다 그 상황에서 거짓을 말했을 때 앞으로 제 인생에 닥칠 위기가 더욱 두려웠던 것 같아요. ‘30대 초반에 이런 중차대한 사건에 거짓말을 하거나 적당히 타협한다면 과연 앞으로 제대로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상식적으로 자신이 담당하던 환자가 사망하면 상황과 정확한 사인을 말해주는 게 기본 아니겠어요. 이런 일에 거짓말을 하고 나서 앞으로 제대로 된 의사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싶었죠.”
 
  -스스로 양심을 어길 수 없던 건가.
  “그렇죠. 그때 타협한다면 앞으로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던 스스로 가짜라는 생각을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어요.”
 
박종철 군이 쇼크사가 아닌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분노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종호 내무부장관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해임해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고문에 가담한 경관이 5명이었다는 사실과 경찰의 은폐·조작이 밝혀지며 시민들의 분노는 신군부 정권에 대항한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1987년 겨울에 벌어진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은 그해 여름 뜨거웠던 ‘6월 민주항쟁의 씨앗이 됐다.
 
  -당시 박종철 군의 사망이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저 또한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전 운동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당시 행동은 의사로서 박종철 군에 대한 당연한 예의였어요. 담당 환자에 대한 도리를 다한 거였어요.”
 
  -당시 결정에 대해 어떻게 회상하나.
  “돌아가도 다시 똑같은 결정을 할 것 같아요. 의사로서 당연한 결정이었어요.”
 
  -그 후로는 줄곧 의사로서 길을 걸어왔다.
  “어차피 정치는 제 분야가 아니에요. 이후로도 정치에 일체 관여하거나 말 한 마디 꺼낸 적도 없죠. 평범하게 의사로서의 제 본분을 다할 뿐이에요.”
 
19571월 태어난 오연상 박사는 어려서부터 의사로서의 미래가 어느정도 정해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비인후과 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너는 나중에 커서 의사가 돼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며 자랐다. 주변의 바람대로 그는 서울대 의대에 진학해 81년 의사면허를 취득한 후로 어느덧 35여 년 간 의사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어린 시절부터 의사를 꿈꿨나.
  “사실 제가 진로를 결정하기 전에 이미 많은 것들이 결정돼있었죠.(웃음) 원래는 공대를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돼라는 대세에 떠밀려 의대에 진학했죠.”
 
  -서울대 의대 재학 당시 어떤 학생이었나.
  “그냥 뭐, 평범한 학생이었죠.(웃음) 키가 크다 보니 농구 동아리를 하고 잠시 테니스 동아리도 했지만 그게 전부예요. 이런저런 활동보다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의대 공부를 열심히 해서 교수가 되는 것이 목표였어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이비인후과 의사로서 흠잡을 데 없는 분이셨죠. 엄격한 분은 아니었지만 제게 기대가 좀 크셨어요.(웃음) 제가는 의대를 나와 교수가 되길 바라셨죠.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셨지만 집안 사정상 강단에서 내려와 개원을 하셨거든요. 가르치는 것에 대한 미련이 남으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바람대로 의대 교수로서 오랜 기간 중앙대 강단에 섰다.
  “당시 용산에 있던 중앙대 병원에서 첫 의사 생활을 시작하며 의대 교수로 재직했어요. 1986년도부터 지난 2008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으니 거의 20여 년이 넘었네요. 모교보다도 중앙대에서 몸담은 시간이 더 길죠.(웃음)”
 
  -강단에서 내려온 후로는 동작구에서 내과를 운영하고 있다.
  “그게 왜 그렇게 됐냐면 환자들이 붙잡아서 그래요.(웃음) 중앙대 병원 때부터 봐왔던 환자들이 주로 이 지역 사람들이다 보니 나가도 멀리 가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동작구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거죠.”
 
  -인연이 깊은 환자들도 있겠다.
  “알고 지낸 지 30년 정도 된 환자도 있고, 이제는 그분들의 자녀들이 오는 경우도 많아요.”
 
  -환자들이 계속 오는 걸 보니 명의인가 보다.
  “의사가 아주 엉터리가 아니고서야 그 인연이 쉽게 깨지지 않아요. 환자와 의사의 인연은 좀 끈끈한 편이거든요. 이익 관계로 만난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오래가죠. 저는 의사가 엉뚱한 짓만 안 하고 성의껏 진료하면 특별히 명의가 아니더라도 관계가 이어진다고 봐요.”
 
  -특히 당뇨병을 깊이 있게 연구한 당뇨병전문의다.
  “당뇨병은 과학적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병이에요. 현대사회 인간의 욕망과 깊은 관련이 있는 병이죠. 결국 마음을 다스려야 해요. 병 중에서도 인문학적인 요소의 영향이 상당히 큰 병이에요.”
 
  -당뇨병 예방을 위한 미덕은 결국 절제라는 건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결국 동물의 몸에서 벗어나있지는 않아요. 바꿔 말하면 그래봤자 다른 동물들에 비해 뛰어난 수준이라는 거죠. 특정 조건에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개 실험처럼 인간도 특정한 것에 세뇌당하고 중독돼요. 본인 마음을 다스리며 생활 속에서 이런 것들을 경계해야 하죠.”
 
중앙대 병원과 중앙대 의대 교수로서 몸담아온 오연상 박사는 현재 동작구에서 개인 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2000년 대한당뇨병학회 초대 홍보이사로 취임하기도 한 그는 병원 진료뿐만 아니라 각종 방송 활동과 강연 등을 통해 당뇨병 퇴치에 힘쓰고 있다. 어느덧 의사로서 한 길을 걸어온 지도 35여 년. 의사로서의 양심을 거스르지 않고 기본적인 자세를 잃지 않고자 노력해온 그의 길을 돌아봤다.
 
▲ 중앙대 병원에서 내분비내과 의사로 재직할 당시 오연상 박사의 모습. 사진제공 오연상 박사
 
  -의사로서 마음에 새겨온 기본 원칙이 있나.
  “의사로서 기본이라는 게 별 거 있겠어요. 돈벌이보다는 환자 건강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최소한 환자 건강에 해로운 짓은 하지 않는 거죠.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지키려고 했어요. 그게 뭐 어려운 거겠어요.(웃음)”
 
  -기본적인 것들을 안 지키는 의사도 많다.
  “세상이 점점 돈에 휘둘리다 보니 그런 거죠. 목숨을 구하기보다는 돈을 잘 버는 의사가 최고라고 생각하니까요. 참 문제죠.”
 
  -지금 우리 사회의 건강을 진단해보자면.
  “병이 좀 들었다고 봐야죠.(웃음) 먹고사는 소화기 쪽은 많이 나아진 것 같은데 요즘은 머리가 많이 아픈 것 같아요.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상대적인 불행에 괴로워하죠.”
 
  -어느덧 의사의 길을 걸어온 지 35여 년이 흘렀다. 지금껏 자신이 걸어온 길을 평하자면.
  “, 최악의 실수는 안 했다고 봐야죠.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그나마 선택을 올바르게 해서 아주 잘못된 길로 빠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사실 잘못된 길이라는 게 현실에서는 일반적으로 약삭빠르고 쉬운 길인 경우가 많거든요. 항상 우리는 그 사이에서 선택의 강요를 받게 되죠.”
 
  -마지막으로 20대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 때와 세상이 또 달라서 요즘 학생들은 지금 나름대로의 어려운 점이 있을 거예요. 눈앞에 이익과 위협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기란 정말 쉽지 않죠.(웃음) 학생 때 정의감에 불타올라서 옳은 말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막상 사회에 나와 실전에 투입되면 그 사이에서 고민되는 일들이 있을 거예요. 그때마다 앞으로 자신이 떳떳한 삶을 살 수 있는 선택을 하길 바랍니다.”

 

▲ 1987년 1월 20일 서울대에서 열린 故 박종철 군의 영결식. 故 박종철 군의 고향 후배인 오현규씨(당시 정치학과 3년)가 영정을 들고 있다. 사진출처 '주간경향'

1980년대는
5공화국이라고도 불린다. 1979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전두환,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새롭게 정권을 잡게 된다. 이전 정권과 마찬가지로 쿠데타로 일어난 군사독재 정권이었던 제5공화국은 19805월 계엄군을 중심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마침내 1987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같은 해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며 6·29 선언이 발표됐으며 이를 계기로 전두환 정권은 물러나게 된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모교보다 중앙대와의 관계가 더 깊다고 할 수 있죠. 서울대에서 머무른 기간이 약 11년 정도라면 중앙대 병원 초창기부터 의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중앙대에 머무른 기간은 거의 30년 가까이 되니까요. 중앙대는 제가 의사로서 첫 발을 내딛고 오랜 세월을 함께한 곳이죠. 병원을 나온 뒤에도 동작구에 의원을 차려 줄곧 이 지역에 머무르고 있어요. 그만큼 끈끈한 인연을 맺은 환자도 있고 이젠 그들의 자녀가 찾아오기도 하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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