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생존의 조건이 아무리 험해도 세상살이가 단순히 먹고사는 일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다. 의미 부여와 가치 추구가 인간 삶의 본질적 차원이라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이상적인 경우라면 이러한 두 가지 문제가 한 방향에서 해결돼야겠지만 현실은 물론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대학은 아마도 이러한 두 문제 사이의 갈등을 가장 첨예하게 매개하는 공간인 것 같다. 인문학, 특히 철학의 경우 이러한 갈등은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갈등이 철학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모든 인간 삶을 관통하는 상수(常數)이며 삶의 도처에서 항상 발생하는 ‘일상사’이기도 하다. 오히려 갈등은 내면적인 사태이거나 외면적인 사건이거나 상관없이 그 자체가 하나의 생동적인 삶의 표식이라 할 수 있다. 갈등한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직면한 현실과 상황을 진지한 대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갈등은 조화로운 삶의 질서에 밀어닥친 위협이 아니라 자기 성장의 자양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철학의 정체성과 연관해서 흥미로운 것은 관조적 혹은 이론적 삶(Bios theoretikos)이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삶(Bios praktikos)보다 우월하다는 전통이 오랜 기간 동안, 어쩌면 아직 까지도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철학은 인간을 현실의 갈등 속으로 인도하기보다는 조화와 초월의 세계로 인도하여 정신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갈등 없는 조화’란 ‘삶이 없는 안식’과 같은 것이다. 최근 신실용주의에 대한 관심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는 존 듀이는 ‘자기-충족적이며 자기-완결적인 어떤 것으로서의 앎에 관한 철학을 유지할 때, 자신들이 공평하고 철저하며 사욕이 없는 반성이라는 대의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육받은 사람들, 특히 교양있는 사람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부류의 학자들을 주지주의(主知主義)의 신봉자로 간주하며 듀이는 그들이 추구하는 세계를 ‘인간이 삶의 고통을 피해 들어가는 은신처’로 평가절하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대학에서 ‘주지’(主知)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사명이겠지만 이것이 ‘주의’(主義)로 흐르는 것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사회 비판적 기능을 간과하고 대학의 교육을 현실적인 수요나 요구에 일방적으로 정향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현실은 항상 가변적이다. 이것은 또한 철학의 탁월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당장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 없다면 우리에게는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는 태도를 지양하고 한 번쯤 쉬어갈 수 있는 ‘사고의 완충지대’가 필요하다. 이러한 쉬어감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인간이 관성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오류를 줄여줄 수는 있다. 갈등의 현장인 학교 뒤편에는 우리를 잠시 쉬어가게 하는 아담한 언덕길이 있다. 이런 길을 걸으면서 잠시 성찰할 기회를 갖는 것도 갈등이 가져다준 소중한 선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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