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한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집안 책 정리를 하다가 오래전에 읽었던 시집 하나를 발견했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라는 19세기 영국시인의 시집이다. 후루룩 책장을 넘기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라는 시다. 한때 시인이자 화가인 그를 좋아한 적이 있었다. 특히 “거리에 핀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라는 구절에 매료되었다. 미시적 사물을 통해 우주적 질서를 찾아내는 통찰이 부러웠다.

이 시를 더욱 좋아하게 된 것은 사실 다음 구절 때문이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천국을 온통 분노케 하며/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시인은 작은 새 한 마리의 고통 속에 천국의 분노를 읽어낸다. 길거리 개 한 마리조차 굶주린다면 국가마저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 시가 쓰인 19세기 영국은 산업혁명 시기였다. 인권이니 복지라는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 무능하고 가난한 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던 시대. 그 잔혹한 자본주의 초기에도 시인은 새장 속의 작은 새와 굶주린 길거리 개를 보며 국가의 미래를 점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시인의 능력이 예언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의 제목처럼 전조와 징후를 읽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삶에 숨어 있는 현실을 통해 미래의 고통스러운 결과를 우려하며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우려가 늘 현실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우려와 걱정은 천국의 분노와 국가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지혜와 실천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 지성계를 놀라게 한 유발 하라리(Yuval Harari)의 『사피엔스』도 이런 점에서 예언적이다. 그는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을 경고한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과학의 발전은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의 궁극적 한계인 죽음마저 극복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많은 과학자들이 예언했던 일이다. 우리의 기억과 영혼마저 컴퓨터에 복사될 수 있는 세상, 그곳에서 죽음 같은 육신의 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물론 부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예언이 인류에게 축복이 될지 저주가 될지는 알 수 없다. 하라리가 질문하듯이 그런 세계에서 진정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까? 50년 내 호모 사피엔스는 사라질 것이라는 그의 예언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라리가 책 말미에 밝혔듯이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 앞에 놓인 세계는 “자연스런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닌 가능성의 세계”인 셈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를 읽어내는 통찰과 새로운 세계를 열어갈 지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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