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있으면 꽉 찬 2년이 됩니다. 누군가의 귀한 가족이 진도 앞바다에서 사라진 그 날로부터요. 벌써 지난해 일이 되어버린 한일 위안부 협상 타결도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제주도 4.3사건 희생자를 추념하기 위해 여러 정치인이 제주도로 향하기도 했죠.

가깝게, 그리고 멀게. 수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대부분이 사람에 관련한 일이었죠. 그 사건을 보며 우리는 말하곤 합니다. ‘영원히 기억하겠다’ 혹은 ‘평생 기억하겠다’라고요.

‘기억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사용해서일까요. 무거운 말이지만 흔하게 느껴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도대체 기억이 뭐기에 우리는 왜 많은 방법 중 굳이 ‘기억’을 수행하고자 할까요?

기억은 인간된 자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된 자의 미래를 위해 수행하는 본능적인 몸부림입니다. 남의 피눈물보다 나의 눈물이 더욱 가까운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만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할 의무가 있다는 것 역시 변하지 않는 사실이죠. 그것이 개인적 고통의 차원을 넘어선 경우 그 의무는 더욱 강화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불안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욱한 무진의 안갯속을 헤매는 현실에서 남의 슬픔과 고통이 오롯이 ‘남의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나의 몸이 상하는 것, 나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 나의 미래가 불안한 것. 두려워할 것들이 너무도 많은 현실에서 타인의 권리와 생명, 명예가 화폐가치로 치환된 역사가 기록되는 것은 우리의 두려움을 더욱 강하게 합니다.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무척이나 불확실합니다. 따라서 외부에서 어떠한 존재를 규정하기 위해 바라보는 것은 대부분 그것의 과거이며 현재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권리를 돈으로 치환한 역사. 과연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한편에 두고 나의 권리와 인간다운 삶을 큰 목소리로 주장할 수 있을까요? 원래 그런 거라고, 전부터 항상 그래 왔는데 왜 너만 유난을 떠느냐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요?

다신 그런 일이 벌어지지 못하도록, 가능하다면 그 일이 벌어지기 전으로 되돌릴 수 있도록, 궁극적으로 ‘나’를 지킬 수 있도록 우리는 타인에 대한 공감에서 출발해 사건 자체를 조망해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그가 다시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서 활개 치는지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과거를, 현재를 망각하게 된다면 이러한 역사를 만들어낸 존재에게 다시금 휘둘리게 되겠지요.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저는 세월호 참사를, 위안부 협상 타결을, 4.3 사건을, 인권이 ‘학살’된 사건을 평생 기억하고 싶습니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유희하는 인간을 넘어 기억하는 인간. 기억의 강한 힘을 알고 실천할 줄 아는 사람. 모두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반드시 지향해야 할 길입니다.
이송주 학생
국어국문학과 학생회장
(국어국문학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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