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일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결국 테러방지법이 통과되었다. 그 후 아는 형이 매일 자기 카톡 내용을 지웠다. 텔레그램으로는 연락에 한계가 있니 뭐니 하면서 매일 카톡을 쓰고 매일 카톡을 지운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뭐야 형, 웃겨’ 하면서 농담을 했다. 그런데 곱씹어 볼수록 아무래도 그건 슬픈 일이었다. 그 대화록들은 우리의 시대에 우리가 가지는 하나의 역사성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지금 여기, 누군가와 만나 함께 살았다는 증거다. 그런 개인의 역사와 서사, 맥락을 국가에 기인한 공포에 의해서 개인 스스로 검열하고 지워나간다는 것이 나는 슬프다.

  『오디세이아』를 보면 아주 흥미로운 점이 있다. 트로이 전쟁에 대해 우리는 대개 오디세우스나 아킬레우스, 파리스, 아가멤논처럼 주요 장군의 이야기를 많이 듣지만 사실 『오디세이아』의 원작은 전쟁에서 죽는 병사 하나하나의 이름을 호명하며 그들의 개략적인 삶과 전쟁에 참여하게 된 맥락, 심지어 개인적 감정까지 서술한다. 개인에 대한 서사와 맥락을 아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과 아주 다르다. 나의 경우, 트로이 전쟁을 두 책으로 접했다. 하나는 『만화 그리스로마신화』였고 나머지 하나는 『오디세이아』였다. 두 권의 책은 이 ‘작은 개인’의 서사를 다루는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병사들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 『만화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나는 영웅들의 서사만을 기억했다. 아킬레우스나 파리스의 죽음에 이입하여 슬퍼했지만 왕자들의 사랑싸움 때문에 창칼에 맞아 죽어간 병사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영웅이 아닌 작은 개인이었고 그들의 죽음은 사소하다고 말하기도 힘든, 애초에 고려되지 않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디세이아』에서 작은 개인들의 서사를 읽은 후에 바라본 트로이 전쟁은 아주 달랐다. 작은 개인들의 죽음은 나에게 거대한 사실로 다가왔다.

  그 사람이 거기 살았다는 기억이 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얼마나 작고 사소한 개인이든 우리의 역사와 맥락은 기억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서로에게 ‘거대한 개인’으로 남을 수 있다. 서로에게 ‘거대한 개인’으로 인식되는 공동체, 그것이 좋은 사회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기록물은 존재 가치가 있다. 『오디세이아』는 사실 작가가 여러 명, 혹은 ‘민중’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SNS가 가지는 역사성과 비슷하다. 개개인이 스스로 생산하고 기록하는, 하지만 기록해야겠다는 목적의식 없이 그저 사생활이나 감정에 기인해 그대로 ‘흘러나오는’ 역사성. 그 역사성의 존재가 우리를 단단하고 거대한 개인으로 설 수 있게 한다. 테러방지법은 그런 개인의 역사성을 파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명백한 퇴보다.

  발자국이 남지 않으면 발이 없거나 영혼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이다. 우리는 발목을 자르거나 영혼 없이 살아가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그건 아주 작은 개인을 만드는 아주 거대한 비극이다.
김상훈 학생
사회학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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