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 제이와이드컴퍼니

진심으로 연기하라. 배종옥 동문(연극영화학과 83학번)이 생각하는 좋은 연기의 근본이다. 어느덧 배우 인생 30여 년 차에 접어든 그녀는 ‘천하일색 박정금’의 선머슴 형사 박정금부터 ‘그들이 사는 세상’의 화려한 여배우 윤영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거침없이 소화해냈다. 인간 내면을 담아내는 배우 배종옥 동문을 만나 보았다.

 
 
섬세한 인간 내면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뭐든 적당히 해선 안 된다
목표를 분명히 하고
스타가 아닌 배우를 꿈꿔라
 
 
 
 가만히 있어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원숙한 여배우. 마주 앉은 배종옥 동문의 첫인상이었다. 그녀는 배우의 길목에서 방황하던 시기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연기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연기는 도발적이면서도 가볍지 않고 슬프지만 담백하다. 진심어린 연기로 많은 이들을 울고 웃게 하는 배우 배종옥 동문을 만나 그녀가 걸어온 길과 배우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전하는 솔직한 조언을 들어 보았다.
 
  -지난해 tvN 월화드라마 ‘풍선껌’ 종영 이후 소식이 뜸했다.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나.
  “오늘 광고 촬영을 끝내고 왔어요. 요즘은 영화 하나 준비하고 있고요. 상업 영화죠.”
 
  -지난 2011년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이후 5년 만의 스크린 복귀다.
  “그동안 제가 할 영화가 없었어요. 요즘은 워낙 남자 배우 위주의 영화가 많다 보니까 제가 출연할 작품이 없었죠. 지금 준비 중인 작품은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서 참여하게 됐어요.”
 
  -영화계에서 여배우를 위한 시나리오가 부재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닌 듯하다.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겠지만 다양한 시나리오가 없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주로 감독이 작품을 쓰기 때문에 시나리오가 편중된 느낌도 들고요. 그러다 보니 조폭 영화나 소위 장사가 될 것 같은 남성 위주의 이야기가 상업 영화의 주제로 많이 쓰이는 것 같아요.”
 
“저는 좀 생각이 많은 편이에요. 캐릭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한 걸음도 떼기 힘들어하는 편이죠. 연기의 길에 들어서고 나서 처음 3년은 많이 방황했어요. 이 길이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했죠. 그러다 어느 순간 조금씩 작품을 이해하게 됐고 그때부터 진정한 제 연기가 시작된 것 같아요.”
 
  -어떻게 배우의 길에 들어섰나.
  “고등학생 때 연극동아리 활동을 하며 중앙대 연극영화학과의 연극을 많이 보러 다녔어요. 그러면서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죠.”
 
  -그 후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83학번으로 합격했다.
  “막상 대학에 와서는 다들 다재다능해서  움츠러들었어요. 내로라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설 곳이 없구나’라고 생각했죠. 저는 평소 소극적이고 조용한 아이였거든요. 대학 시절 동안 진지하게 연기를 포기하려고도 했어요.”
 
  -연기를 포기할 생각이라니.
  “3학년 때 워크숍 작품으로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을 했어요. 사실주의(realism) 극도 쉽지 않은데 부조리극을 하려니 아무래도 어려웠죠. 작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무대에 섰고, 무대 위에서 연기하며 ‘지금 내가 관객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기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연극영화학과 학생이 배우의 길을 포기하면 무얼 하려고 했나.
  “공부를 계속할까, 앞으로 뭘 해야 하나 고민했죠.(웃음)”
 
  -하지만 곧 1985년 KBS 특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데뷔하게 된 계기는.
  “선후배가 다 같이 어울리는 학과 가을 행사가 열렸어요. 우연히 제 옆에 앉은 한 선배님이 너는 요즘 뭐하냐고 묻는 거예요. ‘다른 건 없고 저 그냥 학교 다녀요.’라고 했더니 혹시 탤런트 할 생각은 없냐고 하더라고요.”
 
  -당시 뭐라고 대답했나.
  “이미 마음속으로는 연기를 접었지만 어떻게 답해야 할지 왠지 모를 갈등이 느껴지더라고요. ‘뭐, 기회가 되면 할 수도 있겠죠.’라고 소극적으로 답했죠. 그 후 연락처를 드렸는데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꽤 운명적이다.
  “그렇죠.(웃음) 당시 일요 아침드라마 ‘해 돋는 언덕’에서 작은 역할 하나를 맡게 됐어요. 의도치 않게 연기자가 된 거죠.”
 
  -뜻하지 않게 기회를 얻었지만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
  “특채인 저를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았고, 동기가 없다 보니 늘 외톨이였어요. 연기도 잘하지 못해서 한 3년간 매일 혼났던 것 같아요. 그래도 이상하게 3년 동안 꾸준히 작품이 들어왔어요. 이미 졸업한 후라 돈을 벌어야 하니까 당장 연기의 끈을 놓을 수 없었죠.”
 
  -다른 선택이 없어 연기를 계속한 건가.
  “역할을 맡으면서도 마음은 계속 방황하고 있었어요. 매일 혼나고, 연기를 못 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당장 그만두고 싶었죠. 그래도 차마 졸업하고 나서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없어서 연기를 계속했어요. 만약 어머니께서 ‘당분간 용돈 줄 테니 당장 때려치우라’고 했다면 아마 전 배우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배우의 길에 확신을 갖게 된 계기는.
  “1989년 미니시리즈 ‘왕룽일가’라는 작품을 하면서부터예요. 그때부터 연기의 재미를 느꼈죠.”
 
  -당시 어떤 역할을 맡았나.
  “‘미애’라는 역할이었어요. 서울 외곽의 중소도시 땅 부자의 딸이었죠. 그 동네에서는 잘 나가는 편이라 동네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하지만 서울에 오면 시골 촌뜨기에 불과하죠. 그런데도 서울로 가고 싶어 하는 약간의 허영기가 있는 캐릭터였어요.”
 
  -그 작품을 통해 연기에 흥미를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작품에 참여했지만 스스로 연기를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연극영화과 선배님인 당시 감독님께서 제 연기를 지도해주시고 많이 도와주셨죠. 그러면서 ‘내가 이런 부분을 몰랐구나.’ 깨닫고 일이 즐거워졌어요. 그다음부터 좋은 작품들로부터 제의도 들어오고요.”
 
  -많은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 배종옥 동문은 1990년 영화 <젊은 날의 초상>에서 윤점숙 역을 맡아 제29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사진출처 <젊은 날의 초상> 중

  “‘왕룽일가’가 끝나고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 영화에서 술집 작부 역할을 맡았어요. 이런 역할이 사실 쉽지 않은 역할이거든요. 그런데 감독님, 연출진과 함께 캐릭터를 분석하며 공부하는 과정이 참 재밌었어요. 그때 영화 작업에 매료됐죠. 드라마는 각자 맡은 역할에 집중하는 데 비해 영화는 감독과 배우가 더 친밀하게 작품에 대해 소통하고, 촬영이 시작되면 연출진까지 한 몸처럼 움직이거든요. 촬영 전부터 열정적으로 준비하면서 영화의 매력에 푹 빠졌죠.”
 
  -그 후엔 드라마 ‘행복어 사전’, ‘여자의 방’ 등에서 도시적인 여성 캐릭터를 선보이며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맞아요. 드라마에서 줄곧 도시적인 이미지의 여자 캐릭터를 맡으며 좋은 반응을 얻었죠. 덕분에 배우로서 알찬 20대 후반을 보낸 것 같아요.”
 
“배우로서 저의 40대는 캐릭터의 변화를 추구했던 시기에요. ‘꽃보다 아름다워’, ‘내 남자의 여자’, ‘천하일색 박정금’, ‘그들이 사는 세상’ 등이 모두 40대에 만난 작품들이죠. 그들 중 어느 캐릭터도 비슷하거나 겹치는 장르가 없어요. 매번 다른 캐릭터에 도전하며 그 두려움을 즐기고 배우로서의 스펙트럼을 넓힌 시기죠.”
 
  -40대의 배우 배종옥은 유난히 바쁜 시기를 보낸 것 같다.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야겠다는 갈증이 컸어요. 매번 해오던 연기를 반복하는 것보다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하는 것이 더 재밌었죠. 새로운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내가 넘어야 할 산이라 생각하고 나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던 시기에요.”
 
  -끊임없이 도전하는 힘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나.
  “연기에 대한 열망이죠. 저 스스로 연기 변신을 거듭하면서 연기의 원리를 공부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해보니 이것도 되는구나, 이 연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끝없이 질문했죠.”
 
  -그래서 답을 찾았나.
  “어느 정도 답을 발견하고, 찾기도 했죠. 제가 고민해온 만큼 후배들의 연기를 보면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보이기도 하고요.”
 
  -현장에서 후배들에게 조언도 많이 하는 편인가.
  “사실 그들이 묻기 전에 먼저 알려주지는 않아요. 묻지 않는다는 건 스스로 크게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는 거니까요. 직접 실패를 경험하고 답을 구하는 것도 그 친구가 걸어가는 길의 일부죠.”
 
  -그렇다면 배우 배종옥이 캐릭터에 빠져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실 별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자나 깨나 하루 종일 그 인물을 생각하는 것밖에는요.”
 
  -실제로 그렇게 지내나.
  “전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잘 못 해요. 그래서 한 작품을 시작하면 다른 작품들을 거의 보지 않죠. 책, 영화는 물론 TV도 잘 안 봐요. 되도록 제가 맡은 캐릭터에 집중하며 평소에도 그 인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죠.”
 
  -굉장한 노력이다. 정신적으로 지칠 것 같은데.
  “엄청난 정신력이 소모되죠. 그래도 그게 일하는 재미가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까지 완벽을 추구하는 이유가 있나.
  “그래야 남들과 다르지 않을까요. 사실 완벽이라기보다는 그만큼 제가 맡은 일을 잘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적당히 해서 되는 건 아무것도 없거든요. 누군가는 적당히 해도 잘되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그렇지 않아요. 뭔가 남들에 비해 노력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눈에 띄는 거라고 생각해요.”
 
  -배우 출신 박사 1호로서 중앙대 교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한 10년 했어요. 연기와 병행하느라 체력적으로는 많이 힘들었지만 강단에서 아이들과 함께 소통한 시간은 매우 뜻깊었어요. 그 친구들에게 제가 도움이 되고 싶었죠. 이론 수업에 치우쳐있다 보니 아이들이 연기 현장에 대해 굉장한 갈증을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현장 경험에서 비롯된 한 마디에도 굉장히 재밌어하고 어서 무대로 진출하고 싶어 했죠.”
 
  -좋은 연기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실 연기는 진짜 ‘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아닌 타인을 ‘연기’하는 거죠. 하지만 저는 그 속에서도 곧 나의 모습이 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진심을 다해 감동을 주는 연기가 좋은 연기죠.”
 
  -배우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목적의식을 분명히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중앙대 연극영화학과에 오면 다들 금방 배우가 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그 안에서 의기소침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예요. 저는 후배들에게 진정 배우가 되고 싶은 건지, 스타가 되고 싶은 건지 묻고 싶어요. 스타는 자신의 뜻이 아니거든요. 열심히 하는 와중에 따라오는 거지,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죠. 만약 진짜 배우가 되고 싶은 거라면 지금 당장 안 풀린다고 해서 포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요. 꿈을 포기하지 말고 배우가 되는 길을 꾸준히 찾아가야 하죠.”
 
“연륜 있는 배우라는 말이 제일 불편해요. 연기를 하다 보면 스스로 부족한 모습을 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베테랑 배우다. 연륜이 있으니까 당연히 잘하겠지’라고 말할 때면 불편하고 부담스러워요. 연기는 늘 어려운데 말이에요.”
 
  -어느덧 배우 인생 30년 차다. 아직도 연기에 대한 고민이 있나.
▲ 오랜 친구 노희경 작가와 함께 한 KBS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화려하지만 외로운 여배우 윤영 역을 맡아 열연한 배종옥 동문. 사진출처 ‘그들이 사는 세상’중.

  “당연하죠. 나이 들수록 맡는 역할이 더 어려워져요. 그만큼 연기적으로 해결할 부분도 늘어나죠. 연기를 오래 했어도 그런 것들은 여전히 쉽지 않아요. 매 작품이 제가 넘어야 할 산이죠.”
 
  -도전해보고 싶은 연기가 있다면.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역할을 해서 그런지 어떤 캐릭터를 하고 싶다는 바람은 없어요. 다만 요즘엔 인물 중심의 영화를 해보고 싶어요. 스티븐 호킹의 삶을 다룬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나 윤동주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영화 <동주>처럼 작품을 보며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최근 영화 <노트 온 스캔들>을 보며 주디 덴치의 연기에 감탄했어요. 80살이 넘은 여배우인데 연기를 너무 잘하는 거예요. ‘나도 연기를 계속하면 저런 배우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옛날에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인물에 대한 섬세한 표현과 인간만이 가진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꿔요.”
 
  -인간 배종옥의 인생 계획은 무엇인가.
  “지금까지도 제 뜻대로 자유롭게 살아왔지만 50대에는 외국의 낯선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어요. 작품이 없을 때는 세계 곳곳에서 머물며 시야를 넓히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20대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젊을 때 이것저것 다 해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뭘 하고 싶은지 몰라 넋 놓고 있기에는 젊음이 너무 아깝거든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거 하고 여행도 가고, 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적극적으로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여러 경험을 하다 목표가 생기면 그걸 향해 미친 듯이 사는 거예요.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경제적 독립이 중요해요. 저도 연기자가 된 후 3년간 방황하는 동안 그만두고 싶었지만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계속 몸담고 있다 보니 길이 열렸죠.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한다면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에게 중앙대란?
  “학교 다닐 땐 잘 몰랐는데 졸업하고 나서 선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사회에 들어선 제게 중앙대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죠. 요즘 졸업을 앞둔 후배 여러분들도 취업난 속에 과연 내가 설 곳이 있을까 고민이 많아 보여요. 하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목적을 갖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반드시 좋은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해요. 여러분들의 뒤에는 성공한 선배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만큼 중앙대를 발판 삼아 멋진 계획을 세우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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