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신문사 문화부에서는 '중앙의 예맥을 잇는 신예들'이란 기획을 마련했다.
이 기획은 각 분야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중앙대 출신 동문들에 대한 특
집형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번호에서는 94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6개부문을
석권한 바 있는 이정국 동문을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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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가장 행복해 보일 때가 언제일까. 바로 그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때가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현재 자신의 위치를 예전부터 꿈꾸어 왔으며
이제는 그 꿈을 이루어 어느 누구보다 자기 일에 대한 만족감에 젖어 있는
이가 있어 만나보았다. 영화감독 이정국(예술대 영화학과, 87년졸)

그와의 약속을 정하기 위해 전화를 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작고 힘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를 만났을 때 그의 모습은 자신감에 차 있었고,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그의 자신감은 작품에서도 반영된다. 아무도
큰 목소리로 말할 수 없는 `금기'였던 80년 5월의 광주를 그린 `부활의 노래
'라는 작품이 그러하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부활의 노래'는 많은 한계와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죠
"라고 말하는 그는 5월의 광주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방안을 모색해 보았고
그 결과 가장 파급력이 강한 것이 영화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미해결된 `광
주'라는 소재가 주는 엄청난 중압감, 그로 인한 시나리오 쓰기의 어려움, 사
전 탄압 및 검열, 제작 후 배급의 불확실성, 주위의 냉소 등으로 인해 파국
을 맞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더 큰 자극이 된다. 결국 2년후 모든 사
람들이 불가능하리라고 여겼던 `부활의 노래'는 완성되었고 극장상영이 이루
어졌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진통을 겪었고 힘들었나는 이젠 얘기하고 싶지
도 않다"며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헐리우드 키드는 아니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의 유일한 벗은 영화관이었다
고 한다. 말이 없고 사람 사귀는 것에 소질이 없던 그는 밀폐된 공간 속에서
35미리짜리 카메라가 비춰내는 것들을 보며 자신을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했
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영화관은 불안한 현실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도피처였다. 그 후 영화학과에 입학을 하면서 그는 새로운 장소
를 찾는다. 프랑스문화원은 80년초 당시 사람을 응집하고 유럽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시네마테크였다. 요즈음 산재해있는 영화관과 비디오방에 비해
모자란 영화관람 시설은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모이게 했고 그 곳에서 그
들은 영화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그리고 그 곳의 그들이 이제는 충무로에서
영화일에 몸을 담고 있다.

어린시절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니체'의 책에서 손을 뗄 수 없
을 만큼 그의 철학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 사상을 남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데 목소리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진 그는 주저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영화였다.
그의 첫 작품은 재학중에 만들어졌는데, 취업에 계속적으로 실패하는 백수
의 일상적인 방황과 좌절을 희극적으로 그린 수작이다. `백일몽'이라는 제목
의 이 작품은 그를 자연스레 충무로에 끌어들인다. 하지만 그의 실험정신은
충무로의 상업영화에 그치기에는 정도가 지나쳤음일까.

그는 계속해서 다양하고 새로운 소재를 찾아 헤맨다. `부활의 노래'가 그
렇고 전처와 후처의 이야기를 다룬 `두 여자 이야기'가 그렇다. 한국 전쟁
직후부터 70년대 까지를 배경으로 어려운 현대사를 살아왔던 여인들의 삶에
관해 그린 이 작품은 제목처럼 단지 두 여자 이야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 가난이라는 당시의 굴레 속에서 살았던 세대의 사람들. 특히, 삶의 고통속
에서 얻게 되는 한을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마음 속 깊이 억누르
며 인내해야 했던 어머니들. 그녀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그 속에서 절절히
배어나오는 한국인의 숨결과 삶의 영역을 엿보고자 한 것이 작품 의도이다.
"현대의 젊은이인 `우리'가 `진정 한국적인 우리'의 모습을 되찾기를 기대하
는 입장에서 만들었다"고 말하는 그는 94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6개부문 석권
을 했다고 덧붙이며 자기자랑에 쑥스러웠는지 겸연스레 웃는다. 그의 이런
따스한 웃음을 보면 그의 작품에 나타난 날카로운 풍자가 조금은 낯설게 느
껴진다.

우리의 기억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전통적 한국인의 정서를 영상매체를 통
해 되찾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노력을 담은 리얼리즘 작품인 `두 여자 이야
기'후에 그는 `채널 69'이라는 사이버포르노를 연출한다. 그가 처음 이 영화
의 연출을 맡는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바로 "그건 이정국감독류
가 아니잖아"라고 한다. 아마도 이전의 두 작품에서의 그의 스타일이 `채널
69' 처럼 새로운 스타일에 좀처럼 들어맞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한 작품을 끝내고 나면 질려서 도저히 같은 장르를 연달아 할 수가
없다. 10년 동안은 좀 더 다양한 장르를 접하고 싶다" 이런 욕심은 처음 그
가 영화 이론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그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앞으로 그는
코미디와 스릴러라는 장르로 새로운 실험에 뛰어들 것이다.

세번째 작품인 `채널 69'로 이정국 감독은 `파격'과 `변신'의 절정을 맞는
다. 멀티미디어, 유선방송, 컴퓨터등 첨단 테크닉을 모티브로하여 이 시대를
진단해 본다는 측면에서 낯설지만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한 작품이
다.

그는 세 편의 독립영화를 만들었듯이 저예산 영화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는다. 저예산영화에 대한 견해도 남다르다. "단지 적은 제작비를 이용했다
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이야기일 지라도 큰 핵심을 깊이있게 꿰뚫어 열의를
가지고 치열하게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한국의 영화계는 너무나 열악하다고
말하는 그는 검열속에서 출발한 한국영화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90년대에
본격적인 환경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지나치게 억압적이고 지원이나
자료가 미비하다고 덧붙인다.

다가오는 21세기가 문화의 세기인 만큼 앞으로는 더 많은 것들이 영화에
옮겨질 것이고 그럴수록 시나리오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된다고 한다. 영화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할 것을 부탁하며 그것의 핵심을 놓
치지 말고 영화에 옮기라고 한다.

오는 가을쯤 선보일 또 다른 작품에서 그는 보는 이로 하여금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 영화는 활화산과도 같다. 끊임없는 실험성과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독특한 세계를 유지하는 한 우리에게 그는 진정한 `영
화꾼' 으로 남을 것이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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