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신문은 그동안 ‘편집권 침해 논란’ 속에 있었다. 중대신문의 편집권이 독립적이지 않다는 여론은 적지 않았고 기사에 대학본부의 입장과 해명이 실리면 저의를 의심받기 일쑤였다.
 
  특히 ‘학부학사 구조개편’을 둘러싼 논란 이후 중대신문을 향한 여론의 뭇매는 거셌다. 그 중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중대신문이 ‘기계적 중립성’을 지키고 있으며 민감한 사안에 대해선 해명하는 대학본부의 입장을 ‘기계적’으로 기사에 반절 정도 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편집권 침해 논란이 사그라든 현재까지도 기계적 중립과 관련된 비판은 끝나지 않고 있다. 중대신문이 편집권을 침해받고 있다는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수록 ‘객관’과 ‘기계적 중립성’에 대해 고민했다. 객관과 기계적 중립성은 무엇이 다를까.
 
  ‘객관’은 영어로 하면 ‘Objectivity’다. Objectivity의 본형이 되는 ‘Object’의 뜻은 물체다. 그러므로 객관은 곧 ‘물체의 본질’을 의미한다고 짐작할 수 있다. 물체의 본질은 하나의 시선을 통해 완성되지 않는다. 다각도의 시선과 물체의 모든 면면을 수용하는 자세가 본질에 다가가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기사란 무엇일까, 본질에 다가가는 기사일 것이다. 이는 기자가 자신이 수집한 여러 팩트들을 통해 사안의 맥락을 파악하고 핵심을 짚어내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때문에 기자는 팩트를 끊임없이 긁어모아야 하고 어떤 팩트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누구의 입맛에 맞게 혹은 누구의 처지를 미뤄봐 정당한 이유 없이 기사에 담아야 할 팩트를 걸러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취재를 진행하기 전 미리 사안에 대해 섣부르게 판단을 내리는 것도 위험하다. 팩트에 선행하는 판단은 객관에 도달하려는 언론인의 눈을 가리고 이는 객관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판단은 팩트에 후행해야 하는 것이다. 팩트에 앞서는 것은 의심뿐이어야 한다.
 
  일각에서는 대학본부가 얽혀있는 사안에 대해 기사를 작성하며 대학본부의 입장을 싣는 것을 기계적 중립이라 부른다. 그러나 대학본부의 입장은 중대신문 기자들이 수집한 팩트의 일부분일 뿐이다. 학생의 불만, 교수님의 고충은 대부분 대학본부와 관련돼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면 사안의 본질을 담을 수 없다. 이는 언론으로서 무책임한 행동이다.
 
  또한 일부는 언론이 답을 제시하고 기사의 언어를 통해 사안에 대한 확실한 판단을 내려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를 해주지 않는 언론을 향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언론은 팩트의 배치와 해석을 통해 독자에게 판단의 기회를 열어줄 뿐이다.
 
  중대신문이 객관을 향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는지 아니면 기계적 중립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그것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것 또한 독자의 몫이다. 기자는 그저 기자의 다짐을 독자들에게 밝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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