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기 웹툰을 각색한 TV 드라마 ‘치즈 인 더 트랩(Cheese in the Trap)’에 대한 논란이 시끄럽지만 나는 줄거리와는 별도로 제목에 눈길이 간다. 제목을 직역하면 ‘덫 안에 놓인 치즈’ 정도가 될 만한데 이는 이야기 속 여주인공이 치명적인 남자 주인공에게 끌리는 유혹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치명적인 유혹. 그것은 위험한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는 욕망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이 작품들은 캠퍼스 로맨스 이야기를 중심으로 현재 대한민국 대학생들의 애환을 실감 나게 묘사해서 젊은 시청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덫 안에 놓인 치즈’로 향하고 있는 사람이 여주인공 ‘홍설’이나 젊은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닐 것 같다. 이 작품에서 달달한 캠퍼스 멜로의 파스텔 톤을 걷어버리면 곧장 우리 사회 전체의 일그러진 맨 얼굴이 드러나는 것 같다. 

 뜬금없게도 나는 이 작품의 제목으로부터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이야기했던 ‘악마의 맷돌(satanic mill)’을 떠올린다. 그는 이 용어를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이 “인간들을 통째로 갈아서 무차별의 떼거리로 만들어 버린”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했다. 우울한 사실은, 그가 언급했던 맷돌이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는, 아니 18세기보다도 더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나라에서 회자되는 말들이 ‘흙수저/금수저’, ‘N포세대’, ‘갑질’, ‘헬조선’ 등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의 젊은이들이 정의롭지 못한 시대의 질곡에 사정없이 ‘갈려나가는’ 시절을 버텨내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요즈음 여러 글에서 소위 ‘파국’ 담론이 눈에 자주 띄는 것은 이러한 시대 정황 탓이리라. 아무리 노력해도 견고한 ‘넘사벽’ 때문에 좌절감을 느껴야만 한다면 분명 이 시대는 파국의 정념이 지배하고 있는 때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햄릿이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도다.(The time is out of joint)’라고 독백할 때 엉망으로 뒤틀려진 시대의 징후를 냉소적으로 말하는 상황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파국은 끝임과 동시에 판을 새롭게 짤 수 있는 계기이며 이음매에서 벗어난 시간은 다시 꿰맞출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우리는 치즈 한 조각이 놓여 있는 덫을, 무섭게 돌아가는 맷돌을 치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왜냐하면 브레히트가 말했듯 ‘아무 것도 변화 불가능한 것으로 통해서는 안 돼’는 것이기 때문이고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그랬듯 ‘밤이 최고로 깊어진 시간에야 우리는 최소의 미광(微光)까지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새학기를 맞아 극작가 베케트가 말한 것처럼 다시 시도하고, 또 실패하고, 더 낫게 실패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지 않았던가.
국어국문학과
박명진 교수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