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즐길 수 있는 문화생활은 꽤 다양합니다. 영화나 연극을 보기도 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을 수도 있죠. 전시회도 빼놓을 순 없을 텐데요. 이번주 문화다반사에서는 여러분을 작은 전시회로 초대할까 합니다. <대영박물관-영원한 인간 展>을 통해서는 인간에 대한 깊은 고찰을, <내셔널 지오그래픽-미스테리 월드 展>을 통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자연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두 개의 지면으로 두 개의 전시회를 함께 녹여봤습니다. 찬찬히 문화다반사의 안내를 따라오시죠.
 
 문화 탐구생활: 인간 고찰편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대영박물관 영원한 인간 展(대영박물관 展)>은 이 한마디로 설명될 수 있다. 신석기 시대부터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관한 탐구는 끊이지 않고 있다. 대영박물관 展은 아름다움, 개인, 신, 권력, 변신 등 6개 주제로 동서고금 예술가들의 치열한 사유를 전시한다. 176개 전시품은 저마다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 주제는 각각 달랐다. 각 작품들은 우리에게 인간과 ‘나’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선사한다.
 
인간에서 시작하다 ①
 
 
  전시회 암실 커튼을 헤치고 나아가면  섬뜩한 해골 상이 맞아준다. 실제 해골에 진흙을 바른 전시품이다. 이 해골 상은 1만 년 전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오래된 전시품이다. 하지만 「1만 년 전 장식 두개골」은 단지 가장 늙은 전시품만이 아니다.

  이 전시품은 ‘아름다움’구역에 있는 것이 아이러니할 정도로 투박하다. 이 해골 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영롱한 빛을 내는 조개껍데기 눈알에 있다. 예술에 관한 개념조차 없었던 신석기인들도 조개껍데기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예술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깨우치는 것이라 했던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인간의 본능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름다움’구역이 대영박물관 展의 시작점인 이유가 여기에서 기인한다. 아름다움과 예술을 추구하는 우리의 본능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수많은 전시품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발굴이자 발견 ②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예술품을 꼽으라면 혹자는 밀로의 비너스상을 말할 것이다. 예술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밀로의 비너스상에 대해 들어 봤으리라. 기원전 4세기 중반 프락시텔레스의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는 당대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줬다. 우리가 잘 아는 밀로의 비너스상도 이 작품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프로디테의 토르소」역시 프락시텔레스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이 전시품은 머리도 하체도 없이 몸통만 있어 기괴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작가의 본래 의도는 아니었다. 원래 완전한 조각상이었지만 발굴 도중에 훼손된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복원을 의뢰받았지만 훼손된 상태가 오히려 완성된 아름다움에 가깝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잘린 몸통만이 전시돼 작품의 아름다움이 한층 돋보인다. 상체가 가지고 있는 곡선과 비율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이 말했다 ③
 
 

  서양 미술품들이 즐비한 가운데 정겨운 느낌의 그림이 보인다. 세밀한 선처리가 일품인 「유학자의 초상」은 동시대 서양의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없다. 그림 속의 인물은 문신(文臣)이자 서화가였던 표암 강세황의 손자 강이오로 추정된다. 그는 할아버지 강세황의 재능을 물려받아 매화와 산수를 그리는데 능했다고 전해진다.

  비스듬하게 우리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대나무를 연상시킨다. 그의 풍채에서 절개와 고매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개인적인 감상에서 더 나아가 제작자의 의도와도 일맥상통한다. 전신사조(傳神寫照). 초상화를 통해서 인물의 형상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신까지 담아내고자 하는 의지라는 뜻이다. 전신사조는 조선 시대 초상화의 이상향이다. 내면을 중시하는 조선의 유교적 사상이 초상화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이상적 외면에 관심이 많았던 고대 서양의 초상과는 대비된다. ‘개인’구역의 작품은 화가 한 명, 초상의 인물 한 명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사상과 삶을 담고 있다.
 
땀방울에 맺힌 애정 ④
 
 

  그림 속 그녀는 무표정으로 일관하지만 우리에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 작품은 멀리서 보면 사진처럼 느껴지지만, 자세히 보면 펜이나 붓도 아닌 손가락 지문을 찍어 인물을 표현한 것이다.

  「마르타/지문」의 작가, 척 클로스는 캔버스를 격자형식으로 나눠 그리는 그리드 형식을 빌려 사실주의적 초상화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작가가 그리드 형식을 차용한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안면인식장애를 앓아 사람의 얼굴을 한 번에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난독증까지 앓았던 그는 워싱턴대에서 학사과정을, 예일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그의 노력은 학업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웃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마르타/지문」은 그가 손가락으로 이웃의 얼굴을 그리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마치 이웃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하나하나를 손으로 더듬어보는 듯했다. 애틋했고 감탄스러웠다. 작품은 작가를 닮는다고 했던가. 척 클로스가 이웃을 기억하기 위해 들였던 노력은 정수(精髓)가 돼 캔버스 위에 입혀진 듯했다.

  그림 속 그녀는 무표정이지만 우리에게 무표정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척 클로스는 무표정을 통해 인간의 삶을 녹여낸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그녀의 주름 사이에서 고난과 슬픔을 볼 수 있다. 작가는 본연의 모습을 가공하거나 변형하지 않더라도 대상의 삶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예상한다.
 
에필로그
  대영박물관 展을 즐기기 위한 준비물은 없다. 배경지식도 필요 없다. 인간에 관한 예술가들의 고뇌를 함께하고 그 토론의 장에 들어갈 수 있는 용기만이 필요하다. 전시품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도슨트 시간에 맞춰서 가면 된다. 여건이 안 된다면, 오디오가이드로도 전시회를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영원한 인간이라는 부제는 역설적이다. 인간은 영원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예술은 영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전시를 통해 예술가들의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한 탐구와 불멸성에 대한 추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걸어온 발자국을 되짚어가는 길은 매우 흥미롭다. 인간이 흥미로운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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