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 사이에서 ‘쌍칼’ 혹은 ‘독사’로 불리던 한 교수가 있었다. 넘치는 열정으로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을 휘어잡았던 김성녀 교수(연희예술전공)가 그 주인공이다. 그런 그의 현재 별명은 ‘성녀 마리아’. 이제는 애 엄마가 된 제자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는 친근한 교수가 됐다. 정년이 없는 예술가의 삶에서 교육자로서의 정년을 맞이한 그의 교수 생활을 되돌아봤다.

  본래 배우였던 그가 눈길을 돌린 곳은 다름 아닌 국악이었다. 한국적인 연극을 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연극을 하며 따로 전통연희를 배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는 창극과 마당놀이를 접하며 체계적인 국악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중앙대 국악대에 음악극과를 신설하기에 이르렀다.

  김성녀 교수가 이끌었던 음악극과는 국악과 연극을 접목한 독창적인 분야였다. 지난 2001년 그는 직접 음악극과의 커리큘럼을 짜고 교수진을 모았다. “음악극과를 통해 국악 교육에 대한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어요. 지금도 정말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국악대와 음악극과의 설립은 음대의 한 세부 전공으로만 여겨졌던 국악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이었다. 국악계의 오랜 염원이었던 만큼 제자들과 교수진들이 사명감과 열정으로 똘똘 몽쳤다.

  “제가 이혼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어요.(웃음) 하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요.” 김성녀 교수의 국악에 대한 열정은 곧 제자들을 향했다. 방학을 반납해가면서까지 낙후된 건물 안에서 제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연습했다. 이론만으론 진정한 예술 교육이 될 수 없다고 믿었던 그는 직접 제자들과 창극을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대학교육으로는 제대로 예술을 가르칠 수 없다는 그간의 인식을 깨고 제자들을 가장 경쟁력 있는 예술가로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꿈꿨던 이상은 10년 만에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2011년 국악대가 예대로 통·폐합되면서 제5대 국악대학장에 취임했던 김성녀 교수는 마지막 국악대학장으로 남게 된 것이다. 국악대가 신설되고 예대로 편입되기까지 그 회오리 속에서 굳게 자리를 지켰던 그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의 것을 가르치고 그 전통을 잇는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막을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착잡함과 동시에 회의감마저 들었죠.”

  끝으로 김성녀 교수는 같은 예술의 길을 걷고 있는 제자들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남기기도 했다. 예술인이란 누군가 인정해줘야만 하는 직업이기에 간혹 슬럼프가 올 수 있지만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부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예술에는 긴 호흡이 필요합니다. 인내심을 가져야 해요. 일희일비하지 말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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