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난다. 아무 생각 없이 지하철을 탄다. 집에 가기까지 어떤 생각도 필요치 않다. 새학기 때만 해도 이 길은 많은 생각의 근원지였지만 이젠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눈을 감고도 학교에서 집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이대로 습관 속에 파묻혀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졌다.

무작정 지도를 펼쳐들고 서울 근처를 찾아봤다. 과천을 거쳐 안산이 나오더니 시화호가 위치해 있었다. 시화호라니. 과거 어렴풋이 들었던 미지의 세계가 심연에서 샘솟고 있었다. 거기다 한번도 가 본 적 없는 ‘안산’이라는 도시가 보여줄 낯선 풍경. 이 정도면 여행지로 충분했다.

수요일 정오 수업이 끝나자마자 지하철에 올랐다. 대신 집으로 가는 부천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이제 지하철 좌석에 앉아 19개의 역을 지나기만을 기다리면 됐다. 덜거덕거리는 지하철 소음 속에서 충동적으로 일상을 벗어난 여행자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또 여긴 어디인가….

‘금정’역을 지나자 상황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지하를 굽이치던 지하철이 이제 지상으로 나와 드넓은 대지를 달리는 야생마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늑했다. 높고 기세등등하진 않지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물들이 우리네 사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10여개의 정거장을 더 지난 끝에 ‘상록수역’에 도착했다. 서울시의 인구 분산을 위해 만들어진 안산이라는 계획도시에 푸르름이 가득한 역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마침 첫 눈이 내려 그 기분은 배가됐다.

역을 나서자 아담한 건물들이 이방인을 반갑게 맞이했다. ‘안산’, ‘상록수’라는 입간판을 내건 여러 건물들은 “웰컴 투 안산!” 하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택시 역시 ‘안산’이라는 명찰을 단 병사들처럼 역 앞을 나란히 지켰다. 비로소 ‘서울을 벗어나 안산에 도착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산갈대습지공원’으로 걸어가며 기자는 스마트폰으로 공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공원에 대한 키워드는 ‘국내 최초 대규모 인공습지’, ‘인공 방조제 형성으로 만들어진 인공호수 시화호’였다. 마음 한구석엔 ‘인공으로 조성된 곳이면 집 근처에서 볼 수 있는 호수공원과 다를 게 없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이 생겼다. 하지만 여행자가 발을 뗀 이상 멈출 순 없는 법. 의심 반 기대 반으로 공원으로 나아갔다.

공원으로 가는 길 풍경은 기자가 안산에 있음을 한껏 일러주고 있었다. 도시지만 북적북적하지 않은 안산만의 매력. ‘용신고가’를 넘어가기 전 안산의 이미지는 소박한 도시, 읍내 같은 정겨움이었다.

용신고개를 지나 ‘충장로’로 들어서는 순간 주변은 건물이 아닌 흙과 나무로 가득해졌다. 안산이 보여준 새로운 모습에 스마트폰을 보겠다는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벌거벗은 나무 위에 첫 눈이 덮어준 홑겹 이불이 거리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눈은 나무들에게만 따뜻한 것이 아니었다. 풀숲 위에도, 도보 위에도, 멈춰있는 차 위에도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거리는 백색으로 가득 찬 영원의 세계에 있는 듯한 착각을 줬다. 그 풍경을 눈에 가득 담기 위해 보폭을 좁혀 조금씩, 천천히 걸어갔다.

풍경에 푹 빠져 거리를 걷다보니 어느새 공원에 도착해있었다. 공원이 위치해 있는 시화호는 과거 ‘죽음의 호수’로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공원 역시 암울한 분위기가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공원 어디에도 ‘죽음’이란 글자와 어울리는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공원의 첫 인상은 ‘국내 최초 대규모 인공습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웅장했다. 드넓게 펼쳐진 갈대밭과 맑은 호수, 그리고 뒷산의 풍경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서울에서 볼 수 있는 ‘호수공원’은 녹색의 겉치장을 화려하게 뽐내며 “나 공원이에요”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면 안산갈대습지공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유 있게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기자는 즉시 공원 입구로 들어섰다. 막상 들어서니 입구부터 환경생태관까지 이어진 길은 그저 동네 공원 같은 풍경이었다. 진주는 가리비 안에 숨겨져 있다고 했던가. 눈이 그치고 바람이 좀 멎자 공원은 수줍게 산책로를 내보였다. 생태관 뒤편으로 길게 이어진 산책로는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갈대의 파도로 덮힐 것 같았다.

갈대의 바다로 발을 내딛었다. 마침 갈대가 바람에 고개를 흔들며 기자를 반겨주었다. 겨울의 문턱이어서인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원을 걷는 동안 갈대가 바람에 부서지는 소리만 흐르고 있었다. 간간히 들리는 새들의 울음소리, 습지 쪽에서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가 부서지는 갈대에 동화돼 몽롱했던 의식을 깨워줬다.
공원 근처 습지엔 때를 맞춰 날아온 새들도 있었다. 제방 근처에서 도도한 자태를 자랑하던 백로는 사진을 찍는 줄도 모르고 멋스럽게 습지 위에 서있었다. 이와 반대로 사진을 찍는 것을 눈치 챈 한 무리의 새들은 절도 있는 V자 비행으로 습지 저편까지 날아갔다.

습지공원을 돌며 마주친 수많은 겨울풍경은 과거의 경험, 특히 지난해 수능이 마무리된 겨울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면서 저절로 ‘지난 겨울부터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환기를 위해 떠난 여행이었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공원의 산책길을 전부 돈 뒤 상록수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보니 또 다른 모습이었다. 걸어갈 때는 나뭇가지, 눈, 낙엽의 미동마저도 아름다워 보였지만 버스를 타고 갈 때는 이 모든 것이 스쳐지나가는 한 순간의 꿈 같았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에 가까워질수록 들떴던 마음 한 구석이 텅 비었다. 언젠가 지금 순간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겨울 친구들과 함께 부산으로 해방의 여행을 떠났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받은 바로 그 허무함이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여행이란 것은 허무함과 해방감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세계를 목말라한다. 다행히 새로운 세계는 멀리 있지 않다. 문득 일상에 지루함을 느낀다면 지금 바로 움직여보자. 집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싣는 순간, 여행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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