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다녀와야 사람 된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통용된다. 교육의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던 과거, 군대는 젊은이들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해 왔다. 그러나 사회가 다변화되고 교육의 기회가 확대된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군대는 이제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만 하는 곳’으로 전락해버린 듯하다. 김용철 동문(연극영화학과 82학번)은 군대 또한 가정과 학교의 뒤를 잇는 제3의 교육현장이라 설명하며 군대의 고질적인 폐쇄성, 병사들 사이의 부조리 문화를 퇴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앙대 학생군사교육단(ROTC) 24기 출신으로, 5사단 연대장, 한미연합사 지상구성군 사령부 작전참모차장을 거쳐 장군으로 진급하여 지난해 9공수특전여단장으로 부임한 그를 만나 보았다. 
 
 
연출 꿈꾸던
감성적 영화학도
절제된 직업군인 되기까지

골육지정의 전우애와
솔선수범의 지휘철학으로
선진 병영문화 만들어 가고 싶다

‘권위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이 세워주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김용철 동문에게서 느껴지는 위엄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초지일관 절제된 언행과 눈빛으로 자신의 인생과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 하는 그의 모습은 기자로 하여금 준비했던 질문지를 덮어두고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했다. 실제로 그의 목소리에는 다른 이의 눈과 귀를 집중케 하는 ‘진정성’이 녹아 있었다.
 
“먼 곳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지난해 ‘자랑스러운 중앙인’상을 수상한 이후로 중앙대 동문은 오랜만이네. 들려줄 이야기라고는 군생활밖에 없는 내가 학교 신문에 실릴 만한 사람이 되려나…? 공직자의 신분으로 언론 노출을 꺼리는 편이지만 예쁜 후배가 온다기에 흔쾌히 오라고 했지. 오늘 시간 많으니까 궁금한 거 천천히 다 물어보고 가라고.(웃음)”

-날씨 탓인지, 오다 보니 부대 분위기가 굉장히 무겁다고 느꼈다.(웃음)
“그런가? 이곳이 일반 보병사단과는 달리 부사관들이 많은 곳이라 그런 것 같아요. 간부들이 많아서 그런지 일반 부대보다는 절제되고 딱딱한 느낌이 좀 있긴 하지.(웃음)”
▲ 지난해 9공수특전여단장으로 부임한 그의 모습(가운데). 취임식에 참석한 군중을 향해 경례하고 있다. ‘단결.’

-이곳이 1979년 12.12 사태의 분수령 9공수특전여단 아닌가.
“군부 독재 시절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해요. 고(故) 김영삼 대통령 이후로 군문화는 한꺼번에 바뀌었죠. 예전 12.12 사태의 재현을 걱정할 정도로 국민의식이 낮은 것도 아니고요. 이곳에서 ‘군은 문민의 지배를 받는다’는 ‘문민통제’의 이념 아래 군사력 개발과 운용이라는 저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강원도 산골짜기. 그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던 이승복이 가족과 함께 북한 무장공비들에게 몰살당한 곳에서 나고 자랐다. “1960년 당시에는 기관총과 수류탄을 지닌 무장공비들이 사상교육과 식량 획득을 빌미로 민간인 살해까지 서슴지 않았던 시기였어요. 불안에 떨던 아버지께서는 가족의 안전과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상경을 결심하셨죠.” 가지고 있던 집과 땅을 모두 팔아, 3남 3녀의 대가족은 강릉을 거쳐 서울에 터를 잡았다. 김용철 동문은 서울 혜화 초등학교로 전학해 동성 중학교, 경신 고등학교를 거쳐 중앙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상경이 두렵지는 않았나.
“두려운 마음보다는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큰 결심을 하신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이 컸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했는데 공부만 열심히 했어요. 대학에 입학할 때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니. 의외다.
“전공도 연극영화학이에요. 연출을 해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집안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기 위한 것도 전공 선택의 큰 이유로 작용했어요. 학력고사를 보고 전액 장학금을 주는 승당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저 스스로 ‘가족 도움 없이 스스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학과 수업은 어땠나. 본인의 적성에 잘 맞았나.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자유분방하고 감성적인 기질을 살려 연출가를 꿈꿨죠. 연출은 곧 창작에서 나오는 것이라 등단도 몇 번 시도했어요. 결국 실패하긴 했지만.(웃음) 당시 영화 한 편 만들겠다고 머리와 수염을 기르던 것이 생각나요.(웃음) 당시 생활을 떠올려 보면 아주 무질서했던 것 같아.”

-무질서라니. 지금의 모습을 보면 잘 상상되지 않는다.

“그때는 ‘예술’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취해 서울과 안성을 오가며 16mm 카메라를 무작정 들이대곤 했었죠. 자취방 구석에서 동기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토론도 하고,젊음이니, 청춘이니, 아방가르드니 하면서…. 용산 터미널에서 담배 연기를 폐부 깊숙히 들이마시며 한국 영화의 미래를 걱정하던 것이 생각나요.”

-감성적인 기질이 본래 있었던 것인가. 이런 분이 어떻게 딱딱한 직업군인의 세계에 입문했나.
“문득 덥수룩한 수염과 긴 머리, 검은 야전상의와 흰 고무신을 신은 제 모습에 회의감이 들었어요.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라는 의문은 저를 ROTC에 지원하게 만들었죠. 무질서한 생활을 바로 잡다 보면 질서 있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깔끔하게 머리 깎고 ROTC에 들어갔죠.”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짧은 머리, 절도 있는 몸짓, ROTC에서의 생활은 그의 삶을 180° 달라지게 만들었다. 무질서한 생활에도 옆구리에는 꼭 영어사전과 영자신문을 끼고 학구열을 불태웠다던 그. 밤을 꼬박 샌 그가 시험장에 들어서면 그를 기다리는 여학생들로 강의실이 다소 소란스러워지기도 했다고. 2년간의 과대표 생활과 단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할 정도로 격정적인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예술대 4년 수석 졸업생으로서 대학생활을 마치게 된다.

-예술대 학생회장 선거에서 떨어져 충격이 컸겠다.
“ROTC 출신이 어떻게 학생회장을 겸직할 수 있냐는 논란에 휩싸였었죠. ROTC 출신의 학생회장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을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고요. 비록 당선되지는 못했어도 그런 논리에 맞서 의견 개진을 하고, 표를 끌어 모으려 했던 행동이 리더십을 키울 수 있게 도와주었죠. 그래도 학과 학생회장 선거에는 당선 되었어요. 문득 선거 당시, 학과 동기 정보석과 경쟁하던 것도 생각나네요. 그때는 제가 보석이를 이기고 당선 됐었는데.(웃음)”

-배우 정보석과 돈독한 사이인가 보다.
“얼마 전에도 보석이가 군부대 체육대회에 참여해 부하들의 사기충전을 해주고 갔어요. 연극영화학과 출신이라는 저의 특성상, 다른 이보다 여러 연예인들과 접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하지만 제가 공직에 있는 만큼 이런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공직에 있다 보니 고충도 많겠다.
“가끔 후회도 들어요. ‘전역을 하게 되면 나에게 남는 친구들이 있을까?’ 하고요. 그래도 친구들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는 편이에요. 바쁜 일정으로 모임에 참석하지 못해도 저의 사정을 알아주는 편이죠.”

-다시 학창시절 이야기로 돌아가서, ROTC 생활이 본인에게 준 영향이 크다고 생각하나.
“정문에서 언덕까지 오리걸음으로 기어오르던 훈련은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을 만들어 주었죠. 학과 학생회장으로 활동했던 이력도 수천명에 이르는 병사의 생사를 책임져야 하는 현재의 위치에 있게 도와주었고요.”

-당시 열중하던 영어공부도 본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영어공부를 계속했던 것이 임관 후 큰 장점으로 작용했어요. 한미 연합작전 수행능력이 어느 부대보다도 우선시 되는 특전사의 특성상 영어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었기도 하고요.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미군 부대에서 통역장교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어요. 대령 때 연수를 통해 선진 미군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고요.”
 
지상 3000M의 높이에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는 자신의 주특기를 ‘고공강하’라고 말했다. 낙하산 조종 기술 없이 강하지에 산개하는 전술강하와는 달리 고공강하는 떨어지는 순간 몸의 균형을 스스로 잡는 것이 핵심이다. 자칫 방심하여 정신을 흐트러뜨렸다간, 높은 기압과 바람에 의해 공중에서 몸이 360° 회전해 버릴 것이다. “고공강하 중 정신을 잃을 것 같거나 아찔해질 때가 있어요. 그때 ‘아,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죠. 그래도 다시 마음을 다잡아요. 계속 다그치죠. ‘대한민국 사나이가 한번 죽지 두 번 죽나!’하면서.”

-고공강하에 매력을 느낀 것이 직업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건가.
“그런 것 같아요. 첫 부임지가 공수부대였는데 그곳에서 경험한 고공강하가 정말 재미있었어요. 비행기에서 낙하하며 스스로 낙하산을 펼 시기를 조절하는 것이 매력적이더라고요. 특수부대의 부사관들에게도 인정받았기 때문에 고공강하는 저의 주특기에요.”

-고공강하를 하다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가족들의 걱정은 없나.
“훈련 전에는 가족들에게 일부러 이야기를 안 해요. 훈련을 마친 후에야 알려주죠. 가족들도 아빠가 건강한 것을 아니까 믿어 주는 것 같아요.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젊을 때 입던 바지를 지금 입을 만큼, 체형을 그대로 유지 하고 있거든요. 죽음으로까지 다다를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은 군인에게는 늘 있기 마련이에요. 다만, 가끔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며 속으로 기도하죠. ‘어머니, 그저 살려만 주십시오…! 라고.”
▲ 27년 만에 그가 고공강하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꾸준한 체력관리 덕분이었다. 사진은 고공강하 훈련을 위해 기압과 바람에 저항할 수 있는 사전 훈련을 진행 중인 모습이다.

-고강도의 훈련 덕분인지 몸이 정말 다부지다. 주로 어떤 운동을 하는가.

“테니스와 축구를 주로 해요. 오전 스케줄의 대부분이 체력단련일 정도로 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있어요. 부대 근처에 루트를 따로 만들어 서킷트레이닝과 10km 뜀걸음, 20km 무장급속행군을 하고 있어요. 특히 마라톤을 좋아해서 이곳에 오기 전에는 춘천 마라톤을 3시간 30분의 기록으로 완주하기도 했어요.”
 

-진급이 어렵다는 점이 직업군인의 단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본인의 역량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기준으로 능력을 인정받는다는 사실은 변함없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많았던 저는 다른 장교들에 비해 혜택을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남들이 가기 꺼려하는 전방에 가기를 자처했어요. GOP 철책선의 수색중대장으로 병력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도 했죠.”

-GOP라면 얼마 전 임병장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던 곳 아닌가.
“지역적으로 폐쇄되어 있는 곳이라서 사건·사고가 많은 곳이죠. 민간인의 출입도 제한되는 곳이다 보니 병사들의 자잘한 불만들이 생기기 쉽거든요. 병사들끼리의 소통과 내부 단합이 중요한 곳에서 서로를 믿지 못하면 그런 사고가 벌어져요. 함께 지내는 동료가 언제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뜨릴지 모르는데, 불안해서 근무할 수 있겠어요? 그런 곳에서는 지휘관의 통솔 능력이 더 중요해져요.”

-본인의 주된 소통 방식은 어떤 것인가.
“제가 있는 특전부대는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첫째로 육체적 단련이 중요하죠. ‘함께하는 리더십’의 일환으로 부대원들과 땀 흘리며 육체적 교감을 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종종 목욕도 함께 하고요. 두 번째는 감성이라고 생각해요. 군인이라고 해서 딱딱한 명령지시를 내리기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부하와 진심으로 이야기할 줄 아는 상관이 되고 싶어요. 우리 부대가 특수부대인 만큼 기본적으로 끈끈한 전우애가 있는 편이지만.”

-최근 군과 관련된 사건·사고들이 잦다. 국방부는 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나.
“병영문화의 혁신을 큰 화두로 가지고 군만이 갖는 폐쇄성, 병사들끼리 내려져 오는 악습과 부조리를 없애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소통의 측면에서 부대개방행사를 통해 부모님과 잦은 면담을 하게 하고 인문학 강의도 하고 있습니다. 군대에서 보내는 21개월의 시간을 가정과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만큼 유용하게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명령을 수행하는 용기와 상관에 대한 절대 충성. 그것이 군인의 기본정신이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나.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자세야말로 군인이 지녀야 할 필수자세 아니겠어요?”
 
-얼마 전 이곳 근처에서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다.
“9공수특전여단 소속이었던 정연승 특전 상사가 순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피해자 구조를 하다 신호 위반 트럭에 치여 목숨을 잃었죠. 옛 전우를 위해 우리 부대에서도 십시일반으로 모금했어요.”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순직한 대한민국 군인이 많다. 얼마 전 목함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은 하사 소식이 전해져 큰 충격을 받았는데.
“분단국가에서 군인은 생명의 위협은 물론 책임감과 의무감을 느끼는 막중한 직업입니다. 미국에서 복무하던 시절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유니폼을 입은 군인의 식사비를 대신 내주는 미국인의 모습을 보았거든요. 기본적으로 국방을 책임지는 군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국민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아요.”

-군에 대한 한국 국민의 의식도 점점 발전할 것이라 믿는다. 요즘은 무엇을 하며 지내나.
▲ 2014년 ‘자랑스러운 중앙인’상을 수상한 그(맨 우측).사진제공 ROTC 총동문회
“연말이라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올해 이루어졌던 훈련교육의 성과분석을 통해 내년 부대 운영 계획을 만들고 있어요. 이곳에서 1년을 지내다 보니 공수부대만이 가지고 있는 장단점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외부로 훈련하는 일이 많은 부대 특성상의 타지로의 훈련도 계획하고 있고요.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부하의 전투력 향상과 체력증진을 위한 방법을 강구해나갈 생각입니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제가 살던 자취방 주인과 안성 내리의 배불뚝이 아저씨는 중학생 아들의 과외를 부탁하며 공짜 막걸리를 주시곤 했습니다. 그때 받았던 정 때문인지, ‘중앙인’이라고 하면 정이 가고 친숙하고 그런 것 같아요. 중앙대라고 하면 괜히 대한민국의 중앙에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중앙인의 정신은 이제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성으로 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모교와 국가가 믿어 주시는 만큼, 앞으로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중앙인의 정신을 되새기며 살겠습니다. 저를 도약하게 해준 중앙대에게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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