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해외에 가서 새로운 문화를 잔뜩 맛보는 것일까요. 짐을 싸들고 오랫동안 돌아다니는 걸까요. 우리는 ‘여행’을 생각할 때 보통 위의 두 가지를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여행이 이처럼 거창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은 힘을 빼도 좋아요. 처음 가보는 지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와 천천히 걸어 다닐 여유만 있다면 어디서나 훌륭한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는 ‘정말 이게 여행이야?’라고 생각할 만한 곳을 다녀와봤습니다. 중앙대 병원 앞에서 매일 보는 ‘151번 버스’를 타고 떠난 서울 강북과 중앙대에서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안산갈대습지공원’이 바로 그곳인데요. 문득 정신없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어디로든 떠나보세요. 그 순간, 여행은 시작됩니다.

반복되는 일상, 매일 같은 버스, 항상 타는 곳과 내리는 곳이 정해져 있는 등하굣길, 매번 같은 차창 밖 풍경까지. 그러다 문득 계속 버스를 타고 가면 어떤 동네가 펼쳐질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래서 익숙한 경로에서 벗어나 짧은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중앙대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타봤을 151번 버스를 ‘익숙한 버스’로 정했다. 강북을 가로지르며 7개 대학교를 거치는 수많은 대학생들의 통학버스인 151번 버스. 이 친숙한 버스는 기자를 어떤 낯선 곳으로 이끌까.

빌딩 숲 속 정겨운 모습을 간직한 남대문시장.

주로 ‘서울역 버스환승센터’에서 환승하곤 했던 기자는 서울역 바로 다음 정류장인 ‘남대문시장’에서 하차했다. 남대문시장은 항상 궁금하던 곳이었다. 서울역에서 내릴 때는 ‘다음 정류장’, 명동을 갈 때면 ‘내려야 하는 곳의 이전 정류장’이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듯 멀었던 남대문시장 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섰다.

남대문시장은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이었다. 어묵과 커피를 파는 아주머니, 잡채 크로켓을 파는 아저씨, 식당과 가게가 이어진 영락없는 전통시장의 외형 속에 유명 체인점과 카메라 전문점이 즐비했다. 남대문시장은 명동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왠지 모를 정감이 느껴졌다. 도심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전통시장의 강인한 생명력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남대문시장 여행을 끝내고 바로 옆 명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통시장과 이국적인 건물들이 공존해서인지 남대문시장을 벗어나 명동으로 향하는 기분은 묘했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했다. 명동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생과 직장인, 관광객들로 붐볐고 여기저기서 중국어가 들려왔다. 평소 자주 들렀던 명동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었다. 다시 한번 151번 버스를 타고 미련 없이 명동을 떠났다.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인사동 ‘쌈지길’.

명동을 벗어난 버스는 종각과 조계사를 지나 안국역에 도착했다. 우중충한 날씨 탓인지 인사동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명동에선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사소한 모습이 보였다. 거리에 홀로 앉아 음악을 듣는 외국 청년부터 한국 전통무늬가 그려진 기념품을 구경하는 외국인 가족까지. “이거 왜 이렇게 비싸? 옛날엔 100원이었는데!” 바로 옆 추억의 과자를 파는 가게 앞에서는 ‘아폴로’를 고르고 있던 두 여성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기자도 잠시 카메라를 내려놓고 구경해보기로 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100원, 200원 하던 군것질거리들이 가득했다.

추억의 과자를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인사동 길을 거슬러 올라 고등학생 시절 자주 갔던 정독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공부하다가도 따분해질 때면 친구들과 북촌으로, 삼청동으로 놀러 다니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1977년 개관한 정독도서관은 주변의 덕성여고, 풍문여고, 중앙중·고 학생들뿐 아니라 일반인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 곳이다. 즐거웠던 추억이 가득한 정독도서관을 뒤로 한 채 다시 정류장으로 향하는 거리엔 때마침 하교하는 여고생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벌써부터 내일 점심 메뉴가 별로라며 탄식하는 여고생들의 고민 아닌 고민까지 듣고 나니 잠시나마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돌담이 주는 아늑함을 따라 정독도서관으로 향한다.

안국역으로 돌아와 다시 버스에 올랐다. 차가 막히는 탓에 조금은 더디게 ‘명륜 2가, 성대 입구’정류장을 지났다. 그리고 버스는 순식간에 혜화동 로터리를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진입했다. 평소엔 한 번도 이 이상 151 버스를 탈 일이 없었다. 이제 정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간다는 설렘이 버스를 가득 채웠다. 더 이상 노선도를 보지 않고 버스가 이끄는 대로 창밖의 풍경에 빠져들었다.

정독도서관은 오랜 세월, 항상 같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품어줬다.

“어어? 아저씨, 잠시만요! 저 내릴게요!” 버스가 미아리고개를 넘을 때 즈음 기자는 급하게 소리쳤다. 고개 끝자락에 자리 잡은 성벽을 자세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바로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하차했다. 길을 건너 성큼성큼 ‘미아리 구름다리’에 오르자 발아래로 성북구의 번잡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미아리 구름다리에서 내려온 기자의 눈에 띈 것은 ‘미아리고개 예술극장’. 극장의 입구는 미아리 구름다리 아래에 숨겨져 있어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아담한 극장의 옆 계단을 오르니 작은 야외 로비도 만날 수 있었다. 소극장을 바라보며 공연이 있는 날 이곳에 사람들이 붐빈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봤다. 어쩌면 극장의 입구를 찾느라 헤매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해보면서 말이다. 

도심을 벗어난 버스는 들숨과 날숨을 반복했다. 길음, 월곡 뉴타운을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미아사거리역’과 ‘미아역, 신일중·고’ 정류장에선 다시 많은 사람들을 들이마셨다. 갈수록 건물은 낮아졌고 가로등이 지키고 있는 좁은 골목길이 버스 창밖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서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전에 지나쳐온 곳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학생들이 앉아 있던 자리는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버스에 오른 꼬맹이들이 차지했다. 꼬맹이들을 보며 미소 짓는 승객들의 모습과 창밖의 아늑한 동네의 모습이 겹치며 빌딩 숲을 지나던 151번 버스가 마치 한적한 시골의 마을버스가 된 것만 같았다.

구름다리에 오르자 버스를 타고 지나온 길이 한눈에 보인다.

창밖의 풍경을 보고 내렸던 ‘미아리고개, 미아리예술극장’ 정류장과 달리 이번엔 정류장 이름을 듣고 무작정 하차 벨을 눌렀다. 바로 ‘국립4·19민주묘지’였다. 시간이 늦어 들어갈 순 없었지만 주변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길가에 가득한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 4·19혁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이 길거리에서도 느껴지는 듯해 절로 마음이 경건해졌다. 그 아픔을 알기라도 하듯 사거리에 다다랐을 때도 여전히 동네는 조용했다. 시끄러운 술집도 혼잡한 교통체증도 없었다. 굳이 국립4·19민주묘지를 둘러보지 않아도 숙연한 마음으로 동네를 거닐 수 있었다.

국립4·19민주묘지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낯선 동네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현재 위치도, 가야 할 방향도 모르지만 낯선 동네를 충분히 즐기기 위해 지도를 잠시 넣어두기로 마음먹었다. 낯선 거리를 거니는 설렘도 잠시, 발걸음을 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는 고민에 빠졌다. 삼거리가 나오자 시험 문제지를 받아든 수험생처럼 어느 곳을 골라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지도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워질 때 즈음 노선을 따라 달리는 151번 버스가 나타났다. 우회전하는 버스의 뒷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다시 맞닥뜨린 사거리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른 151번 버스를 기다렸다. 위기 때마다 ‘짠’하고 나타나주는 영웅처럼 듬직하게만 느껴졌다.

부슬부슬 내리던 빗방울이 점차 굵어졌다. 여행을 끝낼 때가 온 듯했다. 제법 쌀쌀한 날씨 속에 특별한 관광명소를 간 것도 아니었지만 낯선 곳에 와있다는 설레는 마음만으로 여행의 기분을 내기에 충분했다. 3번의 환승, 5250원, 그리고 약간의 체력. 151번 버스 여행을 떠나는 데 필요한 전부였다. 중앙대를 떠나 우이동까지 가는 동안 집이나 학교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걱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타야 할 곳도, 내려야 할 곳도 없이 그저 발걸음이 닿는 대로 마음껏 둘러본 여행. 마치 오랜 여행을 끝낸 사람처럼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만큼은 여행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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