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숨겨온 자신의 감성
고스란히 펜촉에 내려놓다

 
아들아, 벌써 연말이 되었구나. 올 한 해도 공부하느라 수고했다.’ 어렸을 적부터 이따금 아버지께 손편지를 받곤 했다. 한 지붕 아래서 매일 보는 가족임에도 정성스레 쓴 손편지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평상시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감성적인 취미는 곧 온 가족의 문화가 됐다. 그렇게 기자도 주변 사람에게 축하할 일이 있을 때면 편지지를 꺼내 천천히 마음을 적어나갔다. 조용한 공간에서 한 자씩 정성스레 적어나갈 때면 그 사람에 대한 감정도, 산만하던 마음도 가지런히 정리되는 것 같았다. 기자는 서서히 ‘손글씨’가 주는 특유의 정갈함에 빠지게 됐다.

  글쓰기가 글자 자체보다 언어의 의미를 통해 본인이 말하고 싶은 감정을 표현한다면 ‘캘리그라피’는 글자 자체에 감정을 담을 수 있다. 한 획에도 특별한 표현을 할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손글씨에 관심이 많던 기자는 자연스레 캘리그라피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서툰 목수가 연장 탓한다’고 처음에는 마음대로 써지지 않는 글씨를 익숙하지 않은 펜 탓으로 돌렸다. 아무래도 혼자는 힘들 것 같았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초보자들에게는 일단 훌륭한 작품을 따라 써보는 게 효과적인 학습 방법이 아닐까 싶었다. 평소 SNS에서 봤던 캘리그라피 작품을 참고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캘리그라피: 글씨를 그리는 사람들’이라는 페이지를 발견했다. 페이지에는 자신이 작업한 캘리그라피 사진과 모임을 만들어 캘리그라피를 공유하고 싶다는 게시글이 있었다. 주저 없이 모임에 함께 하고 싶다는 댓글을 남겼다.
 

  며칠 뒤에 단지 캘리그라피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모인 이들을 만났다. 필통에서 수없이 쏟아지는 필기구, 알록달록한 여러 종류의 잉크, A4 묶음까지. 캘리그라피계의 숨은 고수들이었다. 이들의 손이 스치는 순간 어느새 작품이 만들어졌다. 순식간에 SNS에서 염탐하던 캘리그라피 작품 수십 개가 눈앞에 펼쳐졌다. “딱 6개월만 한 획씩 집중해서 연습해 봐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모임에 참여했던 한 여성의 말이었다.

  그때부터는 글자와의 끈질긴 싸움만이 남았다. 자신만의 글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연습만이 답이었다.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캘리그라피 교본을 펼치고 ‘자음, 모음 따라 쓰기’ 부분을 여러 장 복사했다. 펜의 두께를 이용한 강약조절, 획의 길이를 조절하는 리듬감, 글자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구성이 중요했다. 이런 감각들을 익히기 위해 자음과 모음을 차례차례 쓰는 연습을 하니 초등학생 때 한글을 익혔던 국어 시간이 떠올랐다. 오로지 한 글자에 몰두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그러나 20년 동안 써오던 글씨체에서 벗어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심심할 때마다 펜을 끄적거린 덕분인지 나름 펜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방법을 깨우쳤다. 특히나 캘리그라피는 문장 전체보다는 글자에 집중하는 작업이라 획 하나를 그을 때마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 즐거웠다.
글자뿐만 아니라 본인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었다. 통학부터 수업시간까지 쉴 새 없이 바쁜 일상을 지내다 보면 본인에게 소홀해지기 마련. 캘리그라피를 적으면서 일상에서 마주했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예부터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글씨가 바르게 된다고 했다. 캘리그라피를 쓰면서 기자가 느낀 것은 오히려 그 정반대였다. 캘리그라피를 연습하면서 마음이 바른쪽으로 향한 것이다. 이 바른 마음을 감춰만 두지 않고 소중한 사람에게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노력해서 쓴 캘리그라피를 가족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스마트폰을 몇 번 두드리면 자신의 말을 전달할 수 있는 오늘날. 하루쯤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펜을 들어 캘리그라피를 써보자. 자신의 바른 마음을 한 획씩 꾹꾹 눌러 담는다는 느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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