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참견이 된 조언
무례함도 눈 감고 넘긴다

 
“야, 왜 보고도 무시하냐?” 매일같이 과방에 출근하는 고학번 선배의 첫 한마디. 후배는 살짝 고개만 숙이며 그 선배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앉아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린다. 선배는 곧 후배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군기반장이 된다. ‘나이가 좀 많은 게 유세인가’, ‘괜히 귀찮게 구네’라는 비난의 눈초리를 받으며 말이다. 대학사회에서 ‘꼰대’는 이미 지탄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사라진 것은 꼰대만이 아니다. 후배를 향해 ‘쓴소리’를 던지는 선배들도 함께 없어졌다. 꼰대이고 싶지 않은 선배들은 감히 나서서 후배들에게 싫은 소리를 꺼내지 않는다. 선배로서 해줄 수 있는 진심 어린 조언이나 충고도 ‘꼰대질’로 비칠까 두렵기 때문이다. 오늘날 꼰대가 되기 싫어 선배의 옷을 벗은 학생들의 진짜 속마음을 들어봤다.

대학 내 불청객, 꼰대
자신이 산 인생이 전부인 양 후배들을 가르치려는 꼰대들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 했다. “일일이 관여하는 선배는 꼰대 같아서 귀찮죠. 후배들 사이에서 꼰대로 찍힌 선배는 당연히 피하게 돼요.” 학회에서 활동했던 김수연 학생(숭실대·가명)은 이미 임기가 끝났음에도 굳이 학회에 와서 참견하는 선배들이 불편했다. 한번은 08학번 선배가 신입생을 위한 학술제의 준비를 도와준다며 한달음에 달려와 줬지만 마냥 고맙지만은 않았다. 선배가 학술제의 자료를 보며 ‘주제가 참신하지 않다’, ‘근거가 부족하다’는 등의 조언을 해줬지만 김수연 학생에게는 그저 지나친 간섭과 참견일 뿐이었다. 일찍 끝날 수 있었던 일이 선배의 참견으로 늦게 끝났기 때문이었다.

“너 왜 인사 안 하니?” 새내기 시절 윤현승 학생(인하대·가명)은 한 선배를 보고 인사를 하지 않아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같은 과잠을 입었지만 모르는 사이여서 지나쳤던 선배로부터 왜 인사를 하지 않느냐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물론 선배 입장에서는 선배를 보고도 ‘쌩까는’ 후배로 생각해 한 말일 수 있었으나 윤현승 학생에게는 전형적인 꼰대의 단골 멘트로 들렸다. “인사를 못 하고 지나칠 수도 있지 않나요? 왜 겨우 인사 가지고 핀잔을 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저보다 학번이 조금 높다고 으스대는 건가 싶었죠.”

꼰대가 되기 싫어 입을 닫다
선배가 후배에게 쉽게 쓴소리하지 못 하는 것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선배인 학생들도 누군가의 후배였기 때문이다. 잔소리하는 꼰대는 결국 후배들의 미움을 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은 후배의 도 넘은 행동에도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동아리의 15학번 새내기와 조별 과제를 하게 된 조은수 학생(인하대·가명)은 후배의 무책임한 태도에도 그냥 넘겨야 했다. PPT를 만들기로 한 후배는 PPT를 보내기는커녕 연락조차도 없었다. 겨우 발표를 2시간 앞둔 시점에 보내준 PPT는 무성의하기 그지없었다. 조은수 학생은 화가 치밀었지만 그 후배에게 ‘수고했다’는 카톡을 보냈다. “그 후배의 잘못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나중에 동아리 사람들 사이에서 저에 대한 좋지 않은 얘기가 오갈까 걱정됐어요. 괜히 싫은 소리를 해서 그 후배의 미움을 사고 싶진 않았거든요.”

‘선배, 저 오늘 장례식이 있어서…’, ‘하필 오늘 제사가 있네요ㅠㅠ’ 밴드 동아리의 합주 연습을 앞두고 오는 후배들의 연이은 불참 통보에 윤현승 학생은 할 말을 잃었다. 물론 피치 못할 개인 사정이 있어 연습에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유독 연습 일정만 되면 마치 짠 듯이 개인 사정들이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후배들이 거짓말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이죠. 하지만 괜히 꼰대처럼 보일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어요.” 고작 1년 먼저 들어왔다는 이유로 후배들에게 꼰대짓하는 사람이 되기 싫었던 윤현승 학생은 목까지 차오른 화를 삼켜야 했다.

타들어가는 선배의 속마음
불만이 있어도 쓴소리를 하지 않고 넘겼던 선배들은 나름의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박효빈 학생(숭실대·가명)의 학과에서는 학기 초 한달 동안 서로 존중하는 차원에서 존댓말과 존칭을 사용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재수를 한 후배가 돌연 약속을 깨고 선배와 동갑이라는 이유로 반말을 했다. “저와 제 동기들 모두 당황스러웠죠. 다들 그 후배에게 따로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도 했어요. 그런데 한 동기가 너무 ‘선배 놀이’하지 말자는 핀잔을 줘서 별다른 말없이 넘어갔죠.” 박효빈 학생과 동기들은 말도 없이 약속을 깬 후배에게 핀잔을 줄 수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진 채로 3월을 보내야 했다.

동아리 회장직을 맡고 있던 이종환 학생(창의ICT공대·가명)은 후배들의 소극적인 참여로 골머리를 앓았다. 대부분의 동아리 활동이 투표를 통해 진행되지만 ‘나 하나쯤은 안 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후배들의 무책임한 태도로 투표 참여율이 저조했기 때문이다. 동아리 내에서 엄한 선후배 관계를 지양해 친한 형이나 오빠 같은 사이로 지내던 터라 함부로 좋지 않은 소리를 하기 어려웠다. “투표를 하지 않으면 활동에 차질이 생기잖아요. 그래서 동아리 단톡방에 투표를 공지하면서 투표하라고 좋게 독려했죠. 그런데도 후배들은 그냥 읽고 넘겨버리더라고요.”

쓴소리도 약이다
꼰대가 되기 싫어 입을 다문 그들도 집단 내 싫은 소리를 할 수 있는 악역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윤현승 학생은 잘못된 행동을 하는 후배들에게 잘못된 행동을 알려주며 오히려 관계가 더 돈독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선배가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고 그 충고를 후배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사이가 더욱 깊어질 수 있죠. 선배의 역할도 하면서 후배가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요.”

사회생활 경험이 부족한 후배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일종의 ‘멘토’가 필요하다. 앞선 인식조사의 한 응답자는 “나이가 어리고 아직 사회생활 경험이 부족한 후배들이 많다”며 “그런 후배들에게 적절한 지적과 조언을 해주며 이끌어줄 선배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 많은 경험을 해본 선배들의 충고는 듣기 싫은 꼰대의 잔소리가 아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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