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반달리즘이 거세지는 만큼 마음 타들어 가는 사람도 많은 터라 중대신문 제1858호의 1면에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학우들의 사진이 실렸다. 그런데 건조한 가을 날씨에 타들어 가는 마음이 번졌는지 <심층기획>에도 썸타다 마음까지 타버린 이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썸타는 이들의 마음은 자세히 그려져 공감을 자아냈으나, 타들어 가는 마음은 매한가지임에도 정의감에 불타는 이들이 짤막하게만 다뤄졌다는 것이다. 중대신문이 현재의 이슈와 그에 대한 학내반응에 무관심한 건 아니냐는 생각이 들 법도 했다.

  신문을 세 번쯤 읽으니 나의 판단이 섣불렀음을 알게 됐는데 ‘썸타는 실태 진단’ 코너에서 중대신문이 의도한 바를 읽어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연인도 친구도 아닌 애매한 상태를 썸이라 부른다는 말에서 ‘국정화된 역사 교과서는 교과서인 듯 아닌 듯 애매하다’라는 암시를 읽어낼 수 있었다.  ‘(현 정권에) 좋은 것만 가지려는 이기적인 태도로 보인다’라는 언급이나, ‘(국민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자신의 쿨한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라는 언급은 구구절절 옳은지라 여러모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괄호 안의 말은 기사화되지는 않았지만 신문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런 기운이 강하게 느껴져 본인이 넣어 본 말이다.

  ‘수첩을 열며’ 코너의 목소리 또한 단순히 '썸타기'에 대한 비판을 넘어 ‘헬조선 대표인 듯 대표 아닌 대표 같은’ 누군가를 향한 준엄한 일침처럼 들렸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떠올라서인 듯하다. ‘가정에서는 아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아이들에게 베푸는 보살핌 그 자체에서 보상을 얻으나, 국가에서는 정치 우두머리가 국민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서도 지배의 쾌락이라는 보상을 얻는다.’ 썸만 타려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심리를 이렇듯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 또 어디 있으랴. ‘썸을 선호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감정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라는 연애 칼럼니스트의 지적과도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이처럼 중대신문 제1858호는 뛰어난 은유적 구성을 통해 비판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미학적으로도 우수한 신문임을 보여줬다. 누군가는 은유적 구성이 전달력 측면에서 신문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대가 거꾸로 가듯이 신문도 ‘좋았던 옛 시절’처럼 구성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국정화가 확정된 이후에 기획돼 비판의 날을 더 교묘히 감춰야 했을 지난 1859호는 아쉽다. 시대의 역행을 확인한 것에 분노하여 1면에 ‘초록에 빠지다’라고 써놓으면 요즘 같은 시대에 어찌 새마을운동의 초록 깃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고선 ‘세얼간이의 도시 텃밭’이라니!(세얼간이가 누군지는 분량상 생략한다) 그 시절 언론의 서러움을 중대신문도 느낀 탓이겠으나 ‘유일한 공식 학내 언론’으로서 일시적 감정에 흔들리지 말고 ‘혼’을 바로잡아야 할 때다.
강영신 학생
국어국문학과 석사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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