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중앙 게르마니아

‘이해관계’로 바라보는 증여의 세계와 상업의 세계
문제를 제기하는 사회학, 스스로 문제가 되는 사회학

“학문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하는데, 당신은 무슨 권리로 정치 파업하는 곳에서 연설을 했습니까?”라는 질문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내 말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회학자로서 유명하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사회학 자체에 문제점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 상징적 자본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진리로 판단할 뿐이라는 것이다.

지난 6일 302관(대학원) 301호에서 ‘2015 중앙대학교 독일유럽연구센터 금요콜로키엄 중앙 게르마니아’의 8번째 강연이 열렸다. 이번 강연에서는 박정호 교수(대구대 사회학과)가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학의 문제들』의 내용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을 소개하며 사회학의 역할을 설명했다.

부르디외가 바라보는 사회
부르디외는 사회를 두 세계로 나눈다. 학문, 예술처럼 반 상업적인 질서를 가진 ‘증여의 세계’와 반대로 상업적 질서를 확고하게 믿고 따르는 ‘상업의 세계’다. 대립된 두 세계에서는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 증여의 세계가 사랑이나 친절과 같은 사심 없는 ‘증여’의 가치를 추구한다면 상업의 세계는 합리적인 이윤을 뜻하는 ‘이익’을 추구한다. 만일 두 세계가 순수하게 분리된다면 두 세계는 영원히 서로 엮이지 않고 그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 사회는 사회학이 지적할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부르디외는 두 세계가 서로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증여의 세계라고 오직 지적이고 미적인 활동에 전념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상업의 세계라고 시장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이뤄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두 세계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증여의 세계라는 의미는 합리적 이윤을 추구하지 않을 때 성립하는 것이지만, 증여의 세계 역시 경제적 이해관계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증여의 세계에서도 특수한 이해관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가령 영감에 가득 찬 작품들, 휴머니즘의 철학과 같은 상징적 재화들은 증여의 언어로 포장돼 있다. 사람들은 증여의 세계가 경제적 이해관계를 털어낸 신성한 세계라고 여긴다. 마치 재화들이 상업적 논리의 바깥에서 만들어지고, 분배되고, 감상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부르디외는 ‘상징적 재화의 경제’를 제시하며 증여의 세계를 주장하는 순수한 가치와 인간적인 덕목이 거짓이라고 고발한다. 증여의 세계에서 말하는 순수함의 토대는 사실 굉장히 인위적인 것임에도 사람들은 마치 그것을 자명한 가치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무관심한 척 하는 증여의 세계에서도 그 무관심이라는 특수한 이해관계 속에서 상징적 이익을 거두고 있다고 본다. 비록 증여의 세계를 경제적 이익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실마리 또한 이익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관념만으로 증여의 세계의 성격이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기에 증여의 미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증여’와 반대되는 개념인 이익이라는 용어가 필요하다.

우리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아니다

 부르디외의 사회학에서 이익은 아주 핵심적인 개념이다. 만약 사회학에 이익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사회학은 세계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무상하다’는 순수함 앞에서 사회학은 아무것도 지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략과 이윤, 자본과 같은 기존의 ‘이익’의 개념을 독점하듯 갖고 있던 학문은 경제학이다. 부르디외는 빗장에 갇힌 경제학의 이익 개념과는 상이한 새로운 이익 개념을 사회학에 도입한다. 사회학은 주류 경제학과는 달리 이익의 개념에 초역사적인 보편성이 없다고 본 것이다.

부르디외의 사회학에서는 이익을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자의적인 힘에 의해 제도화된 것으로 파악한다. 이 자의적인 힘은 사회적인 ‘주술’에서 왔다. 사회적인 주술은 특정 인간 그룹이 순수함, 사랑, 진리 등의 고결한 관심사를 생산하며 사람들을 끌어들여 일종의 추구해야 할 경쟁적 목표로 제시하는 일을 말한다. 사회학에서의 이익은 이러한 주술의 구조 속에 기숙한다.

부르디외는 자신이 제시한 사회학의 이익 개념이 경제학 논리가 건드리기 힘든 영역까지 치밀하게 적용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경제학에서는 인간이 이익을 얻기 위해 늘 합리적인 계산으로 행동한다고 본다. 하지만 부르디외는 그런 스콜라적 관점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그저 가상의 인물일 뿐이라고 한다. 또한 일반적인 시장 경제 하에서는 상징적 작업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실제 사회적 행위자는 매순간 합리적인 계산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으로 구체적인 질감을 파악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사회학적 의미의 이익은 머릿속 금전 계산의 차원을 넘어 감각 속에서 현실화되는 개념이다.

사활이 걸린 이해관계에 대하여
사회학은 위와 같이 기존 질서에 문제를 제기한다. 부르디외는 말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회학 자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학이 기존 질서에서 은폐된 것들을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부르디외는 그것을 ‘사활이 걸린 이해관계’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학문 자체의 존재를 걸고 문제를 제기하는 투쟁인 것이다. 사회학이 스스로 문제가 되면서까지 규명하려는 이해관계의 본질은 무엇일까?

사회학이 규명하려는 이해관계는 크게 ‘상징적 혹은 물질적 이해관계’와 ‘사회학적 이해관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상징적 혹은 물질적 이해관계는 고귀하고 사심 없는 ‘열정’, ‘사랑’, ‘헌신’ 등을 통해 실현되는 이해관계이고, 사회학적 이해관계는 그 상징적 혹은 물질적 이해관계의 놀이를 고발하기 위해서는 그 놀이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특수한 이해관계를 뜻한다.

그런 점에서 일반적으로 학문의 세계는 겉으로는 일상적 형태의 이해관계를 초탈한 세계로 이해된다. 이는 사회학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회학에서는 학문이 경제적 이해관계를 초탈한다고 인식하는 정체성이야말로 바로 그들이 가진 이해관계을 불러온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학문의 세계가 지닌 성스러운 이미지를 문제 삼는 것이므로 사회학은 그 본성상 다른 학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학문의 자율성 바로잡기
박정호 교수는 부르디외의 말을 인용해 ‘학문 세계는 그 자율성을 철저히 거만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학문이 가진 도구들은 각자가 가진 위치에 따라 나오는 것이지만, 경제나 정치의 다른 자본들의 간섭을 막기 위해선 오히려 자율성을 지킬 때만이 그 독립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학의 경우 커뮤니티를 제공하고 승패를 가를 수 있는 도구들을 현실 정치의 측면에서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사회학적인 자율화 과정인 것이다. 그 자율화 과정을 살펴보면, 물론 사회학 역시 부르디외 본인의 말처럼 순수함으로 포장된 일반적인 경제의 논리가 관통하고 있다.

끝으로 박정호 교수는 부르디외가 책에서 기술한 내용이 방대해 이를 하나하나 설명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것을 염두에 두고 『사회학의 문제들』을 다시 본다면 부르디외가 왜 이해관계라는 개념을 제시했는지, 그 후 어떤 방대한 작업들을 해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강의를 마쳤다.

  박정호 교수가 학문의 자율성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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