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사건이 발생한다. 살인, 절도, 폭행을 비롯한 일반적인 범죄든 막말과 같이 사회문화적 관습을 어기는 것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문제가 될만한 사건은 관계자의 제보나 언론을 통해 최초로 알려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인터넷에 무수한 유머 페이지나 자칭 광고영업자들이 재량껏 사건을 요약해서 정리한다. 심지어 보도되지 않는(혹은 될 수 없는) 중요한 정보들마저 제공된다. 우리는 편안하게 앉아 글 몇 줄과 사진 몇 장을 보고 나서 판사 흉내를 내면 된다. 기성 제도권의 판결을 받아들이기엔, 그들은 피해자의 인권에는 무관심하고 가해자 인권에만 관대하니까.
 
  ‘가해자에게 인권은 없다’는 명제는 오늘날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욕망으로 읽힌다. 요지는 간단하다. 우리는 미우나 고우나 사회의 규칙을 따르며 살고 있다. 이는 사회에서 시민권을 얻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 조건이다. 가해자는 규칙을 어기고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했다. 그렇다면 눈에는 눈이다. 우리는 더 이상 사회적 규칙에 따라 가해자를 대할 필요가 없다. 이제 그는 사회에서 추방되거나 격리되어야 하며 심지어 정신적·신체적 교정 비용마저 아까운 존재로서 실체적으로 소멸해야 할 불가촉천민으로 취급받고 있다.
 
  가해자를 인권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태도는 피해자에 대한 지원과 재발 방지 대책을 고민하기보다는 가해자에 대한 응징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피해자의 인권을 고려해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피해자의 인권과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별개이다. 설령 피해자가 복수를 바랄지라도 그것은 인권과 무관한 사적 욕망에 가깝다.
 
  더군다나 우리에게는 사건을 판단할 자유는 있지만 판결을 내릴 자유는 없다. 우리는 가해자에게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받지 않았다. 인권은 나와 당신, 가해자 모두에게 있는 권리이고 처벌은 어디까지나 공적 권력의 몫이다. 사적 영역에서 가해자를 응징하고자 하는 연유에는 공적 권력에 대한 불신이 자리해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공적 권력이 사건을 은폐시키고 공정한 처벌을 가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체득해온 사실이다.
 
  심지어 근래에도 인권을 호도하여 오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난 주말 정부가 비밀리에 운영하던 역사교과서 국정화 TF팀의 존재가 밝혀지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야당 의원들이 사무실 출입과 해명을 요구하자 공무원들은 사무실 문을 닫고 경찰을 불러 시설 보호요청을 했다. 대치 이후에는 야당 의원들이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공무원을 감금하여 인권을 유린했다는 정부와 여당의 비판이 이어졌다.
 
  인권은 어디에나 쓰이는 만능열쇠가 아니다. 공무원 개인에게는 인권이 있다. 공무원 개인은 차별받지 않고 노동권을 보장받으며 일할 권리가 있지만 국가의 권력 운용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을 때는 개인이 아닌 국가 권력의 대리체로 존재한다. 인권은 개별 인격체에 있는 것이지 권력과 수단에 속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공무 집행부서의 절차적 정당성조차 의심되는 상황에서 인권 유린이라 비판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는 행위다.
 
  인권에 명확한 정답이 있는 것처럼 서술했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인권은 사회문화적 관습과 시대에 따라 바뀌어왔기 때문이다. 재산권과 노동권의 대립처럼 인권을 이루는 개념 간의 충돌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최근 유럽 사법재판소가 인정한 ‘잊혀질 권리’는 이제 한국 사회에서 더는 생소하지 않으며 여전히 논란이 되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인권은 ‘모든 사람은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이라는 최소합의 합의에 기초해 있다. 지난주 중앙대에서 인권문화제가 열렸다. 앞으로 학내 구성원들이 인권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확대되었으면 좋겠다. 
 
표 석 학생
국어국문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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