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취직하기 전에 주말마다 커피 마시고, 도서관 가고, 영화 보고, 술 마시고. 그거 다 데이트 아니야? 봄 되면 소풍 가고, 가을 오면 드라이브하고, 너 취직했을 때 제일 먼저 전화한 사람도 나고, 너 차 살 때도 같이 가고, 너 집 구할 때도 같이 보러 다니고. 그런데 우리가 그냥 친구라고?”
 
  드라마 ‘연애의 발견’에서 연인 사이가 아니었다는 은규의 말에 화가 난 윤솔의 대사다. 오랜 기간 같이 영화도 보고 공부도 하며 집까지 보러 간 사이인데 그냥 친구라니. 그녀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은규는 당당했다. 연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받은 상처에 대해 책임질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가 생각하기엔 단지 연인 사이라고 오해한 윤솔의 잘못일 뿐이다.
 
  이번주 ‘썸’에 관해 취재하며 수많은 윤솔과 은규들을 만났다. 그들은 연인도 친구도 아닌 이 애매한 사이를 ‘썸’이라고 부른다. 주변에서도 ‘그(그녀)와 그냥 썸만 타는 사이야’라는 말은 심심치 않게 들어볼 수 있다. 그 말의 기저에는 ‘그(그녀)와는 연인 사이가 아니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연인이 되기엔 부담스럽고 귀찮지만 막상 옆에 없으면 허전하기 때문에 썸만 탄다.
 
  사실 연애는 귀찮다. 상대방의 사소한 말,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는 것은 물론 상처가 될 때도 있다. 또 상처를 받으면 어떻게 대처할지도 고민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 혼자 끙끙 앓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은가. 나보다는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 연애고 사랑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소모하며 상대방에게 맞추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호감이 있지만 연인은 아닌 사이를 ‘썸’이라 부르며 즐기기 시작했다. ‘썸만 타는 사이’는 그저 자신의 설렘과 허전함을 채워줄 대상이 필요해서 맺는 관계다. 나를 위해 상대방이 필요한 것일 뿐이며 부담도 없다. 은규가 그랬듯 ‘내 여자친구가 아니잖아’라는 말 한마디면 죄책감 없이 관계로부터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규의 말에 윤솔이 배신감을 느꼈듯, 나를 위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 내가 만난 또 다른 윤솔도 마찬가지였다. 썸타는 남자와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손까지 잡았지만 갑자기 연락이 두절됐다. 알고 보니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하면서 잠시 썸을 탔던 그녀를 정리한 것이었다. 물론 그만의 일방적인 정리였다. 그녀는 내 앞에서 술 한 병 반을 연거푸 비워낸 후에야 겨우 그의 번호를 지웠다. 과연 그도 그녀처럼 힘들어했을런지.
 
  일방적인 관계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역지사지의 태도는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지 않는가. 그런데 오히려 성인이 되면서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연애에서는 특히 더 말이다. 이제는 성인인만큼 ‘썸만 타기’보다는 성숙한 사랑을 할 때가 아닐까?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성숙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미성숙한 사랑은 ‘당신이 필요해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성숙한 사랑은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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