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미국 국립 과학재단(NBIC)에서 융합과학기술의 틀을 제시한 이후 융합이란 단어는 학문의 창의성, 효율성 및 새로운 문화로의 시드(seed)를 넘어 시대를 이끌어가는 시대정신으로 대변되어 왔다. 급변하는 시대의 요구와 다양성에 노출되어 있는 지금, 기존 산업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새로운 학문적 영역의 필요성은 분명 시대적 소명이다. 하지만 문제는 요즘 융합이란 단어가 마치 새로운 시대의 횃불인 양 과대포장되어 기존 학문을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시대의 구호가 되어 간다는 점이다.

 기존 학문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보완하고 심화할 수 있는 학문 간의 접목은 기존 학문 간의 단순 접목이 아닌 새로운 학문적 시류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기존 산업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창의적이고 새로운 기술의 한 분야를 만들어 내는 창조적 융합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창조적 융합에 있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본’과 ‘균형’이다. 융합은 학문 간의 만남이다. 기본에 충실하지 않은 학문은 성숙할 수 없다. 성숙되지 않은 학문 간의 융합은 학문의 미숙아를 낳을 뿐이고 나아가 숙성과정 없는 급조 학문만을 난무하게 해 급 소멸하게 하는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융합은 꽃놀이패가 될 수 없다. 융합에 대한 이론적, 실증적 검토 없이 기존 학문에 대한 부정적 시각만을 강조하고, 필요한 기술적 요구만 만족시키는 학문 간의 단순 조합만으로는 학문의 심화나 기술적 진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미숙한 돌연변이가 되어가는 학문의 융합은 결국 진정한 융합의 기반이 되어야 하는 기존 학문단위의 붕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학문 간의 융합은 새롭지도,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은 이름이다. 우리가 조화와 균형이라는 이름을 붙여 수학의 난제처럼 다뤄오던 풀리지 않은 학문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학문 간의 융합은 단순 기계적 조합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학문에 대한 깊은 성찰과 철학적 사고가 필요하다. 학문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균형 있는 발전을 바탕으로 오랜 고민과 고뇌의 결과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 융합인 것이다.

 융합에 대한 내용이나 실체에 대한 올바른 성찰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기존 학문의 가치를 폄하하고 기형적 학문 탄생을 학문적 다양성이란 잘못된 가치관으로 포장한다면, 우리는 결국 도구적 몰가치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융합은 학문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기회이기도 하다. 학문의 기본을 지키고 학문 간 만남에 기본과 균형을 지킨다면 학문의 가치적 본질을 보호하면서도 심화 발전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각기 학문에 대한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인간의 삶을 향상시켜주는 계기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김주헌 교수
화학신소재공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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