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 구간
 
▲ 1396년(태조 5) 서울 한양도성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의 하나인 창의문. 접근이 어려웠던 숙정문을 대신하는 북쪽의 교통로였던 만큼 한양 백성들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려 숙종 때 남쪽 수도의 궁궐, 조선 시대 왕조의 궁궐, 이어 대한민국의 청와대까지. 시대마다 국가 원수가 머무는 명당은 모두 ‘백악(북악산·342m)’ 아래에 자리 잡았다. 수도 방어의 요새이자 한양도성이 축조된 산 중 가장 높은 백악, 2007년 비로소 일반인들에게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백악 구간의 시작을 알리는 ‘창의문’. 내사산 중 가장 험한 인왕산과 백악을 이어주는 한양 북쪽의 관문이었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 시대의 문루가 그대로 남아있는 창의문은 여전히 그 시대의 건축미를 자랑했다.

 창의문 옆으로 진입하는 백악 구간의 시작, 입구부터 둘러쳐진 철조망은 이 구간이 무언가 심상치 않은 곳임을 느끼게 했다. 신분증 확인과 별도의 신청 절차를 밟아 출입증을 받고 나서야 산에 오를 수 있었다. 이렇게 백악 내의 경계가 삼엄한 이유는 북한 특수군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태’ 격전지였기 때문이다.

 40여년 동안 사람의 손이 타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듯 성벽 안팎으로 무성한 소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울창한 나무를 품은 성벽은 산자락을 타고 끝을 모를 정도로 이어져 있었다. 줄기차게 이어진 성벽이 한눈에 보이도록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순찰 중이었던 군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여기서 찍은 사진 보여주시죠.” 그는 기자가 찍은 사진을 지우며 이곳에서의 촬영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창의문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인왕산보다 경계가 더 삼엄했다.

 백악의 정상을 향하는 길, 한양도성 구간 중 가장 높은 구간답게 급경사의 계단이 반복됐다. 앞발에 힘을 주지 않으면 뒤로 넘어갈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가 내리는 날씨 탓에 계단 외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급경사를 조심하라는 표지판만이 경각심을 줄 뿐이었다. 

 백악에서 가장 높은 ‘백악마루’를 지나 숙정문 방향으로 향했다. 앞서 올랐던 길과 다름없는 길이 이어졌지만 눈에 띄는 비석과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1·21사태’를 알려주는 비석과 사건 당시의 총탄 15발의 흔적을 몸에 안은 소나무는 첨예하게 대립했던 남북 관계를 보여주는 듯했다.

 백악 구간의 정중앙,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숙정문’이 외로이 기자를 반기고 있었다. 숙정문은 도심에서 볼 수 있는 사대문과 달리 유일하게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돼 과거 도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숙정문을 뒤로한 채 쉴 새 없이 내려가 도달한 ‘말바위 안내소’. 출입증을 반납하고 나서야 백악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느꼈던 긴장감을 내려놓았다.

 지금까지의 길이 성벽 안쪽이었다면 ‘와룡공원’까지의 길은 성벽 밖으로 나 있었다. 안에서는 기자의 키 정도였던 성벽의 높이가 밖에서는 손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아 보였다.

 높은 성벽들을 지나 백악 구간의 마지막인 혜화문에 도착했다. 도로 한편에 있는 혜화문에 올라 저 멀리 방금 내려온 백악의 정상을 바라보며 백악 구간의 마지막을 만끽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와룡공원에서 혜화문으로 가는 길까지는 성벽을 볼 수 없었다는 것. ‘저 산성이 여기까지 이어졌더라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혜화문을 보며 아쉬움이 들었던 이유는 백악산에서 본 성벽의 곧음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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