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범광장에서 숭례문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성벽. 훼손된 부분이 보수를 거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남산, 숭례문 구간
 
 남산과 숭례문 구간에는 격정의 조선 근대와 관련된 장소들이 밀집돼 있다. 한강과 가장 가까웠기에 사람과 물자의 통행이 활발했던 숭례문, 국가의 제사를 지냈던 국사당이 있었던 남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만큼 근대화의 중심 무대였던 남산과 숭례문 구간을 거닐어 봤다.
 
남산 구간
 남산 구간이 시작되는 곳은 한국 최초의 실내 체육관인 장충체육관이다. 줄지어 솟아있는 최고급 호텔을 마주한 채 장충체육관 뒷길로 진입하니 흥인지문 구간에서 끊겼던 성벽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낙산은 자잘한 돌들이 아래에 있었던 반면 이 구간은 큰 돌이 아랫부분에서 옥수수알 모양의 자잘한 돌들을 지탱하는 구조였다. 도성은 구간마다 고유의 특색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산은 오를 때와 내려갈 때가 다르다.’ 남산의 성벽을 따라 산을 오르내리면서 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600년간 유지돼 있는 성벽의 모습에 감탄하며 산을 올랐지만 내려갈 때는 국권침탈의 흔적을 절절히 느꼈기 때문이다. 
 
 남산 초입부터 이어지는 ‘나무계단길’ 옆으로는 축성된 지 600여년이 지난 태조 시기의 성벽이 거의 그대로 유지돼 있었다. 다듬어지지 않아 크기가 제각각인 돌들이 마구잡이로 쌓여있는 듯한 모습은 다른 곳에서 봤던 성벽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세월의 흔적을 알려주듯이 돌에는 이끼가 껴있었고 색이 바래있었다.    
 성벽을 따라 오르다 보니 어느덧 남산의 정상에 다다랐다. 풍경의 변화는 정상에서부터 시작됐다. 남산 정상의 명소, 팔각정은 일제에 의해 인왕산으로 이전한 국사당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정자이다. 일제는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국사당이 조선신궁보다 높이 있다는 이유로 강제 이전시켰다. 
 
 12만7900여평의 부지에 15개 건물이 들어섰던 조선신궁. 대규모의 건축이 진행되면서 남산의 성벽은 대부분 훼손됐다. 엄청난 훼손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아직까지 성벽의 터가 남아있었다. 팔각정을 뒤로한 채 성벽을 따라 내려간 곳에 2013년 발굴된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 성곽’의 현장이 보였다. 일제가 훼손한 한양도성의 일부가 남아있는 곳으로 서울시가 한양도성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시대별로 보수된 흔적과 다양한 조선 시대 유물들이 남아있어 한양도성의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고 한다. 
 
 남산을 다 내려올 때쯤 드넓은 공간의 백범광장이 기자를 반겼다. 이곳은 조선신궁이 있던 곳으로 해방을 맞이하자마자 조선신궁은 해체됐고 그 자리에는 ‘백범 김구 선생 동상’, ‘안중근 의사 기념관’ 등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자리 잡았다.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을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대체한 것이다. 
 
숭례문 구간
 관광객들로 분주한 남산을 지나 이번에는 회사원들로 붐비는 숭례문에 도착했다. 상업이 발달한 조선 후기 한양에서 가장 붐비는 시장이 형성됐던 곳이자 서구와의 조약이 체결되며 각국의 공사관과 교회, 학교가 들어섰던 숭례문 주변. 활발한 개발의 결과인지 숭례문 구간에는 도성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건물의 축대나 담장에서 성벽의 흔적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숭례문 구간은 흥인지문 구간과 같이 성벽이 존재했던 곳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성곽길’ 표지판이 안내하는 대로 걷다 보니 ‘배재학당동관’, ‘정동교회’, ‘구 러시아공사관’ 등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들어선 오래된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의 한적한 길을 따라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돈의문 터에 도착하며 짧은 숭례문 구간이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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