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을 보존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그 순간을 기억 속에 담아두거나 사진이라는 기록물로 남기는 것이다. 굳이 흐릿한 기억력에 의지할 필요 없이 요즘은 너도나도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는다. 기억하고 싶은 장면뿐만 아니라 맛있는 음식, 마시는 커피까지 사진으로 남기곤 하는 것이다. 사진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오중석 동문(사진학과 94학번)은 이제 세상의 모든 것이 곧 빛과 관련된 광학(光學)이라 설명한다. 빛이 없다면 결국 세상 모든 만물은 기록도, 기억도 불가능한 것이니까.
 
 
인물·광고·패션
이제는 웨딩사진까지
많은 셀럽들에게 사랑받는 ‘Genius Oh’

패션과 예술을 결합한 전시
12월까지 총 7번 열려
젊음의 거리에서 만나자
 
 DSLR로 사진을 찍어본 사람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컴컴해지는 현상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반사경은 위로 젖혀지고 렌즈가 흡수한 빛은 반사경에 또 한 번 부딪혀 형상으로 우리 눈에 맺힌다. 적은 양의 빛을 포착해 상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카메라는 오중석 동문과 무척 닮았다. 그 또한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금까지 쉴 새 없이 달리고 또 달렸기 때문이다. 빛과 스피드, 초점 등 수많은 조건이 제시간에 꼭 들어맞아야 완벽한 한 장의 사진이 탄생한다지만, 오중석 동문을 만들어 낸 것은 노력, 그저 ‘노력’뿐이었다. 지금의 오중석 동문을 만들어 낸 것이 진짜 노력뿐이었는지 그를 만나 확인해봤다.

“원래 이런 거 잘 안 해요. 나는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터뷰나 방송? 정말 자신 없죠. 사진 찍는 거 아니면 나서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도 나는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사람이라 신경 안 쓰고 말할게요. 물어보세요. 저에 대해 무엇이 그렇게 궁금했던 거예요?”
 
-몇 차례 연락을 드려 겨우 만났다. 작업 활동으로 한창 바쁘신 건가.
“주로 개인 작업을 하고 있어서 그래요. 광고사진, 패션화보를 찍으면서 전시회 준비도 하느라고요. 제 이름을 걸고 하는 전시회라 신경이 많이 쓰여요. 자꾸 전시내용과 사진이 바뀌고 있어요. 전시회를 통해 관객들이 무엇인가 얻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고민이 많죠. 작업은 주로 지금 있는 건물에서 하는데 1층은 패션스튜디오로, 잔디가 있는 2,3층은 웨딩스튜디오로 쓰고 있어요.”
▲ 꽃 사진을 종종 찍는다는 그. 2014년에는 사진전 ‘사진가의 방, ‘꽃’히다’를 열어 꽃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스튜디오를 둘러보니 ‘예쁘다’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주로 스타사진을 찍는 줄 알았는데.
“지하 작업실을 사용하다가 어느 순간 잔디가 있는 스튜디오를 사용하고 싶더라고요. 잔디 깔린 집을 물색하다 역삼동의 이곳을 발견했죠. 아무것도 없이 주차장으로 쓰이던 공간이었는데 제 눈에는 스튜디오로 보였어요. 이곳에서 일하면 하고 싶은 작품들을 마음껏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사용할 명분이 없더라고요. 보통 제가 사진 찍는다고 하면 장소를 대여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평소 웨딩사진을 종종 찍었는데 순간 ‘남들과 다른 웨딩스튜디오를 차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죠.”

-지하를 작업실로 쓰지 않는 이유가 있나.
“너무 일만 해서요.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에서 촬영 작업을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몰라요. 지하실을 쓰다 보면 몸이 너무 안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쓰고 있는 모자에 자꾸 눈이 간다. 모자를 자주 쓰는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가 잇는지 궁금하다.
“패션사진을 주로 찍기 때문에 헤어스타일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어요. 일주일에 두 번씩 머리를 깎고 강력한 흑인 모발용 왁스도 사서 발랐어요. 하루 종일 머리가 세워져 있어야 하니까. 그러던 와중에 샌프란시스코로 출장을 갔는데 함께 간 동료에게 선물로 모자를 받았어요. 어려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 모자를 쓰지 않았는데, 쓰다 버릇하니 계속 쓰게 되더라고요. 작업할 때 가장 편하기도 했고. 제가 모델도 아닌데 겉치장에 신경 쓸 필요 있나요.”

-지금 많은 스타에게 오중석 웨딩스튜디오는 인기 절정이다. 다른 스튜디오와 차이점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면 스튜디오 홍보 같아서 말 잘 안 하는데, 전혀 달라요. 전혀. 어찌 됐든 명분을 세워 두고 스튜디오를 차렸으니 최고의 스튜디오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죠. 노력하다 보니 보답이 나왔고. 스튜디오 만든 지 3년 반 정도 됐는데 웨딩촬영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원하던 위치에 서게 된 것 같아요. 웨딩사진은 한 달에 한 번 찍겠다는 제약을 두었더니 올해 촬영 예약은 올해 초에 이미 꽉 찼어요.”

-얼마 전에는 홍대 팝업 스토어에서 사진전도 열었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MCM 브랜드 쪽에서 같이 하자고 제의를 해왔어요. 2,3주 간격으로 전시작품을 바꾸는 릴레이 방식으로 12월까지 7번의 전시를 해요. 넓지 않은 장소라 중간중간 사진을 가져다 놓고 있는데, 전시가 끝날 때쯤이면 다양한 컨셉의 작품이 한 곳에 다 모여 광기 어린 곳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전시회 장소가 왜 하필 홍대였나.
“오로지 젊은 층에게 집중할 수 있는 핫스팟이라서? 원래는 청담동이나 가로수길에서 전시회를 하려고 했는데 그곳은 젊은이들과 회사원들이 공존해 있잖아요. 홍대는 오로지 젊은이들로만 북적이죠. 첫 번째 사진전은 ‘펜트업 앵거(Pent-up Anger)’를 테마로 젊음의 울분을 다뤘어요. 이번주 에는 꽃 사진을 좀 걸어볼까 생각 중이에요. 꽃 사진은 제가 평소에도 많이 찍어 왔던 것이기도 해서.”
▲ 현대 무용가 전혁진의 섬세하고 강렬한 순간의 몸동작을 사진에 담았다. 젊은이들의 내적 분노와 갈등, 억눌린 자유에 대한 갈망을 감성적으로 표현했다. 찍힌 사진을 거꾸로 뒤집어 ‘울분’을 주제로 한 전시전의 첫 번째 포스터로도 사용했다고.꽃 사진을 종종 찍는다는 그. 2014년에는 사진전 ‘사진가의 방, ‘꽃’히다’를 열어 꽃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젊은이들의 울분이라면 어떤 울분을 말하는 건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울분이요. 가슴 속의 분출되지 못한 화에 대한 전시에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의 아픈 부분을 담고 싶었어요. 라이언 맥기니 식으로 젊음의 방황을 해석하기 싫었죠. 첫 전시 포스터에 나온 친구는 현대 무용가 전혁진이에요. 얼굴이 아니라 몸에 포커스를 잡아 역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했어요.”
-강렬한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피사체와 교감하는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나.
“주로 대화로 교감하는 편이에요. 제가 원하는 컨셉을 상대에게 이해시키는 편이죠. 제가 상업사진을 주로 찍는 작가라 그런지 클라이언트와 일할 때도 보통 ‘이해당하거나 이해시키거나’의 방식을 사용해요. 클라이언트의 생각을 들으려고 노력하는데, 그것도 때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때에 따라라니. 무슨 말인지 자세히 듣고 싶다.
“보통 광고를 떠올리면 소위 ‘간지’를 생각하잖아요. ‘간지’보다 ‘제품’에 주목해야 할 때가 있는데 말이에요. 소주 광고는 꼭 짧은 미니스커트만 입고 찍어야 하나요? 그래도 클라이언트가 십수 년 간 고수해왔던 방식을 굳이 고집한다면 맞춰 찍어요. 제가 그들의 컨셉 의도에 맞춰 사진을 더 잘 찍어 주면 되는 거니까.”
 
-진짜 프로다. 그렇다면 본인이 잘 찍을 수 있는 사진은 어떤 것인가.

“인물사진이요. 촬영했던 인물 중에 어떤 사람이 가장 기억나느냐고 묻지 마요. 지나간 것들에 대한 감상에 젖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이미 찍은 사람들에 대해서보다 앞으로 찍을 사람들에 대해 주로 고민해요. 그런데 제 인터뷰, 좀 딱딱하죠?”

“사진하고 살면 너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젊은 시절의 전부였다. 한때는 신문기자로 일해보고 싶었고, 잡지사의 기자, 파인아트 전문기자도 되고 싶었다. 단지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라는 생각이 패션 사진작가에 멈추어져 있는 것뿐이다. 생각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습작을 거듭하니 20대에는 말도 안 되는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이루어져 있더라. 젊을 때 겪을 수 있는 실패를 많이 느껴라. 지금 나 정도 되면 시행착오는 못한다. 내가 실패하면 그건 그냥 이 세계에서 ‘감’ 떨어진 거니까.”
 
-40세 이전에 패션잡지 ‘Vogue(보그)’ 커버를 찍는 것이 꿈이었다고 들었다. 이미 32살에 그 꿈을 이뤘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20대에는 말도 안 되는 꿈이라고 생각했던 보그 화보를,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찍었더라고요. 누구에게나 한 번씩 기회는 오는 것 같아요. 저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아 열심히 했더니 인정받아 계속 기회가 찾아온 것이고요.”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우연히 고등학교 때 사진을 처음 찍어 봤는데 매력적이더라고요. 그 순간 ‘평생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고등학교 1학년 때 집안의 반대가 심했는데 아버지께 사진 아니면 학교 안 가겠다고 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학력고사를 보고 떨어져서 1년 더 열심히 공부해 중앙대에 들어갔고요.”

-학교에는 잘 나오지 않는 학생이었다고 들었는데. 이유가 무엇인가.
“1학년 때는 열심히 다녔어요. 학교가 너무 재밌었으니까.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갔다 왔는데 그 이후로는 학교를 거의 안 갔죠. 지금 학교는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 수업은 저에게 실망스러웠던 것 같아요. 1980년대 ‘커머셜 포토’라는 일본 잡지에서 부록으로 준 비디오테이프를 수업에서 보여주더라고요. 차라리 필드로 나가 일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 어시스턴트로 일했죠.”

-그런데 현재는 KAC 한국예술원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다. 모순적인 것 아닌가.
“교수제의를 많이 받았는데 제가 있는 학교의 경우 학장님이 저를 여러 번 찾아오셨어요. 가르치는 일에 흥미가 없었는데 마음대로 가르쳐도 된다고 해서 교수직을 맡았죠. 학생들이 열심히 따라 주지만 제 기대에는 못 미쳐요. 저의 수업방식에 적응하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 놀라 도망가는 학생들도 있고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요즘 학생들은 주목받을 기회가 적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도 제가 사진을 배우던 당시는 ‘절망적이긴 했어도 혜택을 받았던’ 시대였으니까.”

-절망적이었지만 혜택을 받았다니. 요즘 시대가 어떻길래.

“지금은 누군가의 눈에 띄기 힘든 구조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랫사람에게 선뜻 큰 프로젝트를 맡기기 힘든 구조라는 거죠. 과거에는 사진작가들이 많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시스턴트도 한 명을 두는 시스템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스승님과 일하는 분들이 일적인 문의를 다 저에게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 이름을 외워주었는데…. 지금은 사진이 디지털화되며 어시스턴트만 5명을 둬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운이 좋았죠. 주목받을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었으니까. 그 당시 방법으로 사진작가 되려고 하면 지금은 씨알도 안 먹혀요.”

-어시스턴트 당시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힘들었던 적은 없었나.
“셀 수 없이 많죠. 제가 너무 바빠서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한 것? 차이고 맨날 옥상에서 징징대며 울었던 것? 당황한 나머지 여닫이문에 끼어 손톱이 빠졌던 것, 다친 것을 숨기고 일하다 스승님께 혼난 것, 그런데 그 손으로 다음날 운전해서 안면도에 간 것까지.(웃음) 다 지난 일이에요.”

기회는 누구에게나 한 번씩 온다.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 스스로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해 ‘오중석 천재’를 공책에 빼곡히 적었다는 그는 현재 ‘지니어스 오’ 라는 필명으로 Vogue(보그), Elle(엘르), Bazaar(바자) 등 유명 패션잡지의 사진작가이자, 고소영, 정우성, 송혜교 등의 톱 모델,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는 사진계의 진짜 지니어스로 활약하고 있다.

-우연한 기회를 놓치지 말라니. 기회를 놓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건가.
“사실 저도 기회를 놓쳐 후회한 적이 있긴 하죠. 2007년 파리 헤어 메이크업 에이전트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을 때 거절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요. 그곳의 제의를 받아들여 또 다른 도전을 했다면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르는데.”

-화제를 바꿔서, 얼마 전 개그맨 정형돈씨와는 하와이에도 다녀오셨다고.
“형돈이네와 겨우 시간을 맞춰 다녀왔죠. 비행기 표를 미리 사지는 않고 3,4일 직전에 끊는 편인데 ‘너 시간 언제 돼?’하면 ‘나 이 날 돼’하고 바로 떠나요. 와이프끼리 서로 친하기도 하고요. 원래는 스케줄이 있어 여행을 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날짜가 확정되지 않은 일정이 있어 겨우 다녀올 수 있었어요. 저는 3박 5일. 형돈이는 4박 5일로요. 사실 여행 왜 갔냐고 묻는다면 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웃음)”

-MBC ‘무한도전’ 달력 사진을 계기로 친해진 건가. 무한도전 출연 계기가 궁금하다.
“바빠서 방송을 잘 챙겨 보지 않는 제가 유일하게 보는 TV 프로그램이 무한도전이었어요. 같이 방송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와 흔쾌히 승낙했죠. 사실 당시 저는 패션, 광고 분야에서는 안 찍어 본 사진이 없어 매너리즘에 빠진 상태였거든요. 일밖에 모르는 예민한 사진작가였던 제가 무한도전 달력 사진을 찍으며 달라지는 것을 느꼈어요. 성격이 많이 유해졌다고 해야 하나.”

-착해졌다는 의미인가.
“딱히 생각나는 표현이 없는데 그 표현이 적절한 것 같아요. 방송출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니 다른 사람을 좀 더 보게 되었어요. 인지도가 높아지니 남에게도 신경이 많이 쓰여 선행도 하게 됐고요.”

-선행이라면 재능기부를 말하는 건가.
“봉사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해 본 것 같아요. 영정사진을 찍어드리는 봉사활동도 했었고 한복의 세계화 프로젝트에 참여해 한복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죠. 그런데 실제로 봉사를 해보니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것은 실질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 분을 찍더라도 필요한 분을 찍어드려야 하는데, 시간적 여유가 많고 경제적으로도 불편함이 없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러 온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그만뒀죠.”

-금전적인 기부도 했다고 들었다.
“벼룩시장을 통해 기부금을 모으기도 하고 주머니에 500만원을 넣고 몇 개의 기관을 찾아다니기도 했어요. 좋은 일 하기 참 힘들다고 생각했죠. 돈과 함께 귤 한 박스를 사서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녀도 신뢰가 가는 기관 하나 찾기 힘들더라고요.”
 
‘나를 깜짝 놀라게 해봐.’ 그가 지도하는 학생과 제자에게 늘 하는 말이다. “항상 채찍질하는 스타일이에요. 잘하면 잘했다고 칭찬해주지만 빈도가 아주 드물죠. 좋은 말을 자주 해주는 편이 아니라서.” 그러나 기자는 느꼈다. 조금은 거만하고 무심해 보이는 태도 뒤에는 노력하는 이의 정성과 성의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포토그래퍼의 프로의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그런 섬세한 예리함이 없었다면 세계가 주목하는 지금의 포토그래퍼 오중석은 없었으리라.

-마지막으로 사진을 잘 찍고 싶은 이들에게 한마디 해 달라.
“사진을 전문적으로 잘하려면 SNS를 잘 활용해도 좋아요. 사진만 잘해서는 안 되는 시대가 되었으니 자신의 취향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SNS거든요. 괜히 그곳에 헛소리를 찍찍하지는 말고요. ‘사진작가가 SNS에 사진 올리기 망설여지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을 듣곤 하는데 전혀 망설여지지 않아요. 버튼 하나로 사진이 생산되는 오늘날, 우선 많은 이들에게 ‘Like’를 받으려고 노력해보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좋은 사진은 어떤 사진이라고 생각하나.
“그런 질문 제발 하지 마요. 누구나 좋아하는 사진은 애초에 없으니 좋은 사진을 한 줄로 정의하려 들지 말라는 거예요. 그냥 본인이 오랫동안 보고 싶은 사진이라면, 그게 그냥…. 좋은 사진 아닌가요?”  

-당신에게 중앙대란?
“사진작가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했을 당시, 저는 무조건 중앙대가 아니면 안 됐어요. 중앙대에서 배운 이론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현상되지 않은 미완성의 필름으로 끝났을 거예요. 대학 내 사진 수업에 대해 쓴소리를 했지만 필드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이곳에서 배웠어요. 이곳에서 운 좋게 기회를 잡아 필드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셈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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