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다크 투어리즘

▲ 기이한 모습의 남영동 대공분실.
 
심문을 위해 
고안된 건축물 
억압과 폭력의 시대를 대표한다
 
 
 ‘의혈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 중앙대 학생들이 민주화 과정에서 변화의 국면을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경찰의 방망이와 최루탄을 뚫고 힘겹게 한강을 넘었던 중앙대 선배들과 달리 기자는 아무런 저항 없이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그렇게 선배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 심문과 고문을 당했던 민주화의 어두운 과거,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에 도착했다.  
 
 지하철 1호선 남영역, 솟아 있는 건물들 사이로 이질적인 모습의 건물이 도드라져 보였다. 평소 지나다닐 때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곳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대공분실. 멀리서 대공분실의 검은 건물을 보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건물 자체가 주는 느낌이 너무나도 음산하고 께름칙했기 때문이다. 
 
 잔뜩 긴장을 한 채 건물에 점점 다가가니 건물 주위로 담벼락이 솟아 있었고 그 위로는 마치 군부대처럼 촘촘하게 철조망이 쳐있었다. 용기를 내 활짝 열린 정문을 통과. 정문 옆에는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는 철문이 보였다. 도대체 이곳은 뭐 하는 곳이기에 이렇게 경계가 삼엄한지 의문이 들었다. 또 창문의 모양은 왜 이리 기괴한지, 정상적인 형태의 창문과 폭이 좁은 창문이 어지럽게 혼재돼 있었다. 특히 5층은 전체가 아주 좁은 창문으로 이뤄져 자칫하면 5층이 없는 것으로 오해할 뻔했다. 
 
 잔뜩 긴장한 기자와 달리 주위의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들이 자연스러운 이유, 바로 대공분실이 경찰청의 인권센터로 탈바꿈했고 이들은 이곳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자도 긴장을 조금은 내려놓고 본격적인 관광을 시작했다. 
 
 대공분실은 본관과 별관으로 구성돼 있다. 현재는 본관 1층의 ‘인권센터 역사관’과 4층 ‘박종철 기념전시실’, ‘인권교육·전시관’, 5층 ‘(구)조사실’이 다크 투어리즘 장소로 개발돼 있다.  
 
 먼저 1층의 인권센터 역사관을 탐방했다. 역사관을 통해 이 기이한 건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1976년 치안본부(현 경찰) 대공과 대공분실이 설립되면서 남영동에 청사가 지어졌다. 대공분실은 ‘해양연구소’라는 간판으로 위장해 외부에서는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면서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됐던 대공분실의 본모습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경찰은 2005년 ‘과거에 대한 반성과 희망찬 미래를 향한 경찰의 진정성 있는 노력’을 표방하며 대공분실 청사로 경찰청 인권센터를 이전했다. 과거를 잊지 않고 다시는 같은 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지려는 노력은 곧 이곳을 다크 투어리즘의 대표적인 장소로 만들어줬다. 
 

 ‘박종철 기념전시실’이 있는 4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념전시실에는 1980년대 민주화 과정과 故 박종철이 사망 당시 입고 있었던 옷부터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까지, 故 박종철의 일생이 담겨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냈던 친필 편지의 한 구절이다. 재수까지 하며 서울대에 진학한 그, 멀리 부산에 계시는 부모님에게 투옥됐다는 소식을 알리면서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인물도 민주화 열사이기 이전에 기자와 비슷한 또래 학생이고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었다.

▲ 故 박종철이 물고문을 당해 숨을 거둔 509호 조사실의 모습. 현재는 조문 장소로 쓰이고 있다.

 서울대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故 박종철은 바로 5층 (구)조사실 509호실에서 경찰의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경찰, 당시에는 정권을 위해 무고한 국민을 짓밟기도 했다. 먹먹한 마음을 안은 채 5층으로 올라갔다. 2개의 두꺼운 철문을 열고 들어선 (구)조사실의 모습은 흡사 감옥과 같았다. 조사를 받는 사람이 출구를 알 수 없도록 모든 문의 모습은 동일했고 외부의 빛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곳이지만 금방이라도 누군가 나타나 끌고 갈 것 같은 두려움에 식은땀이 흘렀다. 두려움에 압도돼 차마 조사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5층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 나선형의 계단은 곧장 5층 조사실로 연결된다. 모양이 똑같아 출구를 알 수 없고 밖에서만 잠글 수 있는 문, 이곳은 취조와 고문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었다.
 한참 동안 마음을 다잡고서 다시 5층으로 올라갔다. 먼저 故 박종철이 고문을 받은 509호로 향했다. 건물 밖에서 봤던 기이한 모습의 창문, 안에서 보니 좁은 틈으로 최소한의 빛이 들어와 음산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실제 고문이 벌어졌던 장소에 오니 공포감은 더욱 심해져 서둘러 전등 스위치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누군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며 물고문이 이뤄졌던 수조와 세면대를 바라봤다. 
 
 고요한 조사실에는 대공분실 바로 옆을 지나는 지하철 소리만 이따금 요란하게 들려왔다. 차가운 금속성의 소리는 조사실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끌려와 이곳에서 심문과 고문을 받은 사람은 지하철 소리를 들으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지하철 소리는 외부세계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망과 공포를 느끼게 했을 것이다.
 
 대공분실 관광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남영역으로 들어왔다. 지하철 플랫폼 밖으로 여전히 음산한 대공분실이 보였다. 지하철은 대공분실을 뒤로한 채 한강을 향해 달렸다.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전과는 달리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한강철교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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