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십니까. 7시 뉴스입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시작할 때 즈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다. 특유의 절제된 목소리로 대한민국의 저녁 7시를 책임지고 있는 김진희 동문(응용통계학과 98학번)은 2004년 KBS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해 ‘사랑의 리퀘스트’, ‘세상은 넓다’, ‘생로병사의 비밀’ 등 지금까지 약 17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올해로 입사 11년차인 그녀는 현재 ‘KBS 뉴스 7’에서 대한민국 대표 여성앵커로 활발히 활약 중이다. 
 
아나운서란?
아나운서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메신저예요. 스스로를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보다 그저 내용의 전달자로서 시청자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빼어난 미남미녀일 필요도 없어요. 단정한 외모와 거슬림 없는 발음이 아나운서의 기본 자질이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양’이 아닐까 싶어요. 똑똑하고 지적이고 그저 우아하기만 한 의미의 교양이 아니라, 생활적인 부분에서의 매너와 예의를 포괄하는 진짜 ‘교양’ 말이에요. 아나운서의 영역이 넓어진 오늘날 이런 점이 일반 방송인과 구분되는 아나운서만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아함 뒤에 숨겨진 날카롭고 이성적인 프로의식

딱딱한 뉴스지만 서정성과 따뜻함을 담아 전달하고 싶다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보았을 때,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가 있다. 냉큼 뛰어가 ‘기사 아저씨에게 멈춰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과 그냥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그것이다. 김진희 동문은 이런 상황에서 늘 다음 버스를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떠나려는 버스를 허둥지둥 붙잡지 않을 만큼 여유 있고 침착한 사람이지만 남들보다 한 치의 뒤처짐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막 뉴스 생방송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를 여의도 KBS 본관에서 만났다.
 
-기다리는 동안 ‘KBS 뉴스 7’을 잘 보았다. 오늘 뉴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안은 무엇인지 알려 달라.
“오늘 뉴스에서는 특히 충청도 지역에 가뭄이 들어 벼농사를 망쳤다는 소식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그래서 제가 ‘농민들은 시름이 깊어지고 속도 쭉정이처럼 텅텅 빈다’ 라고 앵커 멘트를 썼죠. 이런 일을 보도할 때 가장 마음이 아픈 것 같아요.”

-전화 통화는 물론이고 실제 목소리도 무척 좋다. 어릴 적부터 한 목소리 했을 것 같다.
“지금이야 목소리 좋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사실 어릴 적에는 그렇게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어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했었거든요. 우물우물 똑바로 말하지 못하는 버릇은 아나운서 준비 당시 훈련을 통해 많이 고쳤어요. 목소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색깔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목소리의 크기나 톤은 후천적으로 많이 교정된 것이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니 믿기 어렵다. 그런 사람이 뉴스 생방송에서는 전혀 떨지 않고 매끄럽게 방송 진행을 잘하더라. 남들 앞에 서는 게 익숙해 보이던데.
“좀 이상하죠.(웃음) 소심한 아이였어도 반장, 부반장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했거든요. 반장, 부반장을 하려면 보통 활동적이고 리더십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자기 생각을 큰 소리로 이야기 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쑥스러운 듯 할 일은 다 했죠. 한번 하니까 계속하게 됐던 것 같기도 하고요.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에 많이 띄는 학생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특출나게 전교 1등을 하는 아이는 아니었죠.”

-어떤 가정에서 자랐는지도 궁금하다.
“섭섭함을 느낄 정도로 저희 부모님은 자유방임주의였어요. 흔한 성적문제로도 부모님께 혼이 나거나 꾸중 들은 기억이 없으니까요. 다른 애들은 성적표가 나오는 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성적표를 숨기기 바쁜데 저는 그럴 필요가 없었죠. 집에 가면 항상 책상 위에 뜯기지 않은 성적표가 놓여 있었거든요. ‘네가 먼저 확인하고 보여 달라’는 의미였던 것 같아요.”

-독후감 발표대회에서 수상했던 적도 있었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내성적인 성격임에도 남 앞에 서서 관심을 받는 것을 즐겼던 것 같아요. 남의 말에 재빨리 근거를 내세워 반박하지는 못했어도 미리 연습과 준비가 가능한 독후감 발표는 잘 할 수 있었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다수의 학생 앞에 서는 것이 꽤 좋았던 모양이에요.”
-이 일을 계기로 아나운서의 꿈을 꾸게 됐다고 들었다.
“발표대회에 나가서 수상을 할 때마다 담임선생님께서 아나운서 하면 잘 어울릴 거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 말을 듣고 ‘아나운서가 뭐지?’라는 생각이 들어 아나운서에 대해 찾아봤죠. 그때부터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막연하게 꿈꿨던 것 같아요. ‘아, 나는 아나운서가 되어야겠다’하고.”

-그런데 대학교 전공은 응용통계학이다. 아나운서치고 특이한 전공인데.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없었지만 대학에서는 제가 좋아하는 것을 배우고 싶었어요. 아나운서의 등용문은 신문방송학과나 어문계열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아나운서는 전공이 중요하지 않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거든요. 당시 저는 문과 수학을 아주 좋아했고 소질도 있었어요. 대학에 입학해서도 제가 배우고 싶은 영문학 수업을 주로 선택해서 들었던 것 같네요..”

-대학교에 입학하고 어떤 활동들을 했는지 궁금하다.
“1학년 1학기 때는 아주 불량학생이었죠.(웃음) 대학에 입학하고 어울려 다니던 친구 7명 중 5명이 학사경고를 받을 정도였으니까요. 저도 그 5명 중 한명이에요.(웃음) 그 정도로 합이 잘 맞고 대낮부터 친한 친구들과 수업도 안 가며 낮술 마시고 놀았죠. MT도 다니고 재밌게 놀다가 2학기 때부터는 정신 차리고 바짝 공부했어요. 학기 초에는 잠깐 UBS 방송반에 가입했는데 금방 나와 버렸어요. 친구들과 더 놀고 싶은데 시간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 점이 싫었거든요. 학과 소모임을 만들긴 했어도 따로 중앙동아리에 들지는 않았네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교수님은 있나.
“지금은 총장님이신 이용구 교수님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당시 교수님의 <기초통계학> 수업을 들었는데 하도 말씀을 재밌게 잘하셔서 수업 하는 내내 웃으면서 즐겁게 들었어요. 지금도 종종 모교 행사에 참석하곤 하는데 저희 학과 전공 교수님이셨던 분을 학교에서 다시 만나니 너무 반가운 마음이 들었어요. 아나운서인 제가 봐도 교수님은 여전히 청중들에게 유머 있게 잘 다가가시는 것 같아요.”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는지 궁금하다.
“고학년이 되면서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친구들과 스터디를 만들었어요. 아나운서 학원에 다녀보기도 했는데 금방 나왔죠. 이미 방송에서 활약하는 여성 앵커들의 모니터링은 물론이고 상식 공부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시간이 날 때면 친구들과 서로의 모습을 찍어주면서 방송 연습을 하고 부족한 부분을 피드백 받기도 했고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언론고시 준비 과정은 힘들었을 것 같다.
“학과 친구들은 통계청이나 증권사로 취업 준비를 하는데 저는 방송사 시험만 준비하다 보니 심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어요. 내성적인 성격인 저에게 ‘네가 무슨 아나운서야?’라는 시선도 있었고 당시 아나운서는 소위 ‘빽’이 있어야 한다는 루머가 있어서 제가 될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본 KBS 시험에서 낙방했을 때 가장 좌절감이 심했죠. 그래도 졸업 직후 2번째 본 공채시험에는 바로 합격했어요. 요즘도 그렇지만 들어가는 문이 좁고 실력이 좋은 친구들은 워낙 많았거든요. 운이 좋았던 편인 것 같아요.”

-롤 모델로 삼았던 아나운서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황수경 아나운서를 저의 롤모델로 삼았어요. 황수경 아나운서의 교양 있어 보이는 모습을 정말 닮고 싶었거든요. KBS에 입사한 후에 황수경 아나운서가 저의 직속 선배셨는데 그 때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어요. 같은 사무실을 사용하면서 많이 친해질 수 있었고 종종 고민상담을 해 주셨거든요. 황수경 아나운서가 KBS 퇴사를 할 때 가장 많이 울었던 사람도 아마 제가 아닐까 싶어요.”

-입사한 후 생방송 뉴스를 맡았다. 가장 아찔했던 순간을 하나 꼽자면.
“2006년도 초년병 시절, 탄식성 멘트로 대중들의 구설에 올랐던 적이 생각나요. 이 방송사고는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핑계 아닌 핑계를 좀 대자면 당시 뉴스 진행에 필요한 그림, 원고가 늦게 와서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이었거든요. 연차가 생긴 지금은 그런 상황에도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지만 그때는 신입이라 많이 당황스러웠죠. 작게 탄식성 멘트를 뉴스 도중 뱉어버렸는데 그 일로 시청자들에게 욕과 조롱을 많이 받았죠. 의욕만 넘쳤던 신인이라 벌어진 사고였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 영상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웃음)”

-그 당시의 경험을 발판으로 다양한 분야의 방송 진행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기자 개인적으로는 ‘사랑의 리퀘스트’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
“‘사랑의 리퀘스트’는 지금도 제 기억에 남아 있는 프로그램이에요. 안타까운 사연을 방송해서 소외된 이웃을 돕자는 취지의 방송이었죠. 제가 진행을 맡았는데 참 많이 울었어요.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남자 선배가 혼자 진행한 적도 있었을 정도로. 진행자가 무너지면 안되는데 참 많이 무너졌던 것 같아요. 그래도 이 프로그램은 분명히 시청자들에게 용기과 희망을 주는 부분이 있어서 위로를 받기도 했어요. 공영방송이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프로그램이 없어질 때 참 마음 아팠죠.”

-최근 방송을 하면서 가장 떨렸던 적은 언제였나.
“가장 최근에 떨었던 적은 2012년 대선 개표방송인 것 같아요. 연차가 좀 되었을 때 맡게 된 영광스러운 방송이었는데도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쏠려 있는 방송이라 상당히 긴장됐죠. 사실 대선 방송은 예상된 시나리오대로 진행되지 않아 정해진 큐시트가 따로 있지 않거든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중요한 생방송이어서 많이 떨었지만 그만큼 재미와 스릴도 동시에 느꼈어요. 대선 방송은 진행자의 순발력이 생명인 것 같아요.“

-본인이 순발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별명이 코알라, 나무늘보라고 들었는데.
“제가 사실 일 외적으로는 게으르고 느긋한 부분이 좀 있어요. 친한 동료 아나운서들은 저를 ‘엉망진창’이라고 표현하거나 엉뚱한 부분이 있다고 말해요. 원래 성격이 치열한 성격이 되지 못하는데 정작 일하는 곳이 경쟁을 해야 하는 환경이라 초기에는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나 이런 성격은 차차 방송을 하면서 해소가 됐어요. 일이 재미있으면 스스로 부지런해지잖아요. 좋아하는 일에는 정말 열정적으로 일하는 편이라 꼼꼼히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래요. 일적으로는 프로의식을 발휘하는 편이죠.”

-이렇게 열정적으로 일한 덕분인지 ‘중앙 언론인 상’도 수상했다.
“중앙 언론인 상을 꽤 어린 나이에 받았어요. 보통 중견급 언론인이 받는 상을 연차가 적은 저에게 주셔서 놀랍고 기뻤어요. 이 상은 고민이 많던 당시의 저를 일으켜 세워준 상이기도 해요. ‘아나운서는 방송인인가, 예능인인가, 혹은 언론인인가’하는 고민의 경계선에서 방황하고 있었거든요. 상을 수상하면서 제가 가야 할 길은 ‘언론인’이라는 다짐을 하게 됐죠. 저에게 언론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다시 새겨준 상이었던 것 같아요.”

-올해로 방송생활 11년 차다. 현재 소망하는 일을 말해 달라.
“결혼한 지 5년이 다 되어 가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 소망하는 일은 2세 탄생이에요. 일도 계속 열심히 하고 싶고요. 사실, 예전보다는 상황이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는 어리고 미혼인 여성 앵커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기혼 여성 앵커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앵커로서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제가 몸소 실천하고 싶어요. 나이를 먹어도 멋있는 여성 앵커, 젊음보다는 연륜을 중요시하는 시대가 되었을 때 제가 연륜으로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보여주고 싶죠.”

-언론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다. 앞으로의 계획도 듣고 싶다.
“아마 대부분의 방송인들이 꿈꾸지 않을까 싶은데, 토크쇼를 해보고 싶어요. 뉴스라는 것이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세상 곳곳에서 저마다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프로그램을 해보고 싶어요. 저는 늘 마음을 담으려고 노력하는 아나운서라는 점에서 다른 아나운서들과 차별성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기술적인 면은 누구나 잘할 수 있지만 마음을 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에요. 지금처럼 일을 즐기면서 발전해 가고 싶어요. 양이나 질을 떠나서, 앞으로도 진정성이 담긴 마음을 담는 아나운서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중앙대는 ‘그 때는 몰랐던, 나의 가장 빛나는 시절이 담긴 곳’인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기가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라는 것을 대부분 모르다가 아주 뒤늦게 깨닫죠. 한참 전 일이라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돌이켜보면 저에게 중앙대 재학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였어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한 번쯤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시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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