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렬 개그맨 겸 MC(연극영화학과 87학번)
  • 박민지 기자
  • 승인 2015.09.14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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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초로는 다 풀어내지 못할 그의 이야기
 일종의 위장이 아닐까. 작은 키와 재치있는 입담으로 8,90년대를 종횡무진 했던 그였지만, 사실 이것들은 그가 진짜 정체를 감추기 위해 잠시 쓰고 있는 가면일지도 모른다. 이홍렬 동문은 78년 ‘산울림 콘서트’로 데뷔한 후 ‘청춘 만만세’, ‘귀곡산장’, ‘이홍렬 쇼’, ‘한다면 한다’ 등 100여 개의 프로그램에 참여해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준 대한민국 대표 개그맨이다. 또한 그는 연기·음반제작·출판·봉사·교수 등 분야를 넘나들며 다양한 활동에도 도전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제 그를 무어라 호칭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매번 변화된 모습으로 등장해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자신을 오래 각인시키는 ‘노력꾼’이라는 것이다.
 
 
그가 50대 끝자락에서 집필한 책 ‘60초’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어느덧 6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의 가슴은 늘 무엇인가를 계획하는 일에 설레고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변사 역할을 맡아 무대 위에 선다. 그를 만나기 위해 공연 리허설이 한창 진행 중인 장충동을 찾았다.

-이번 공연에서 변사 역할을 맡았다고 들었다. 공연 준비로 바쁜 때를 보내고 있는 것 같은데.
▲ 이홍렬은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의 변사역할을 맡아 열연 중이다.
“10월, 청주에서 있을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 공연 준비를 하고 있어요. 처음 악극 제의가 들어 왔을 때 ‘악극은 나이 든 사람이나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 나이가 벌써 60살이더라고요. 덥석 출연 제의를 받았죠. 이번에 맡은 변사 역할은 33년 전 신인상을 받게 한 역할이기도 했거든요. ‘아, 이 극본은 나를 위해서 쓰여졌구나’ 생각 하며 연기하는 내내 악극의 감초 역할을 맡고 있죠.”
 
-사실 ‘이홍렬’하면 프로그램 ‘이홍렬 쇼’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 95년 당시 SBS-TV '이홍렬쇼'제1회가 방영됐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에서 5년간 대중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제가 54년생인데요. 기자님은 몇 년생이에요? 이홍렬 쇼라고 들어는 봤나요?(웃음) 지금도 나이 지긋하신 분에게 ‘참참참’하면 막 웃으세요. 그 정도로 당시 파급력 있었던 프로그램이었죠. 저 스스로도 이홍렬 쇼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결정적인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해요. 이제껏 많은 프로그램들을 했지만 유난히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기도 하고. 사실 개그맨으로서 한참 전성기가 지났을 때 맡았던 프로그램이었는데, 이홍렬 쇼 덕분에 박수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었거든요. 저에게는 영예로운 프로그램이죠.”
 
-큰 무대에 서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언제부터 무대체질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가.
“의외로 어릴 적의 저는 숫기도 없고 내성적인 학생이었죠.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는 꿈은 중학교 때 가졌던 것 같아요. 당시 ‘분단이동’이라고 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자리를 이동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반 전체 아이들에게 ‘너는 그쪽으로 가, 우리는 이쪽으로 갈 테니’라는 말을 했어요. 별로 웃기지 않은 말인데도 반 친구들이 다 웃더라고요. 그 말로 선생님께 엄청 혼났지만 아이들 앞에서 큰 웃음을 주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꼈어요. 그 일을 계기로 개그맨이 되기로 결심했죠.”

-이렇다 할 개그맨 등용문이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 같다.
“당시에는 앞이 캄캄했어요. 저희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고 아버지는 철공소 산소용접을 하셨거든요. 그런 가정환경에서 난데없이 개그맨이 되고 싶다고 하니까 부모님께서 걱정이 많으셨어요. 개그맨은 아무나 되는 것도 아니고 돈도 빽도 없는 네가 개그맨이 되기는 힘들 것 같다면서. 그때 저는 ‘터널’을 떠올렸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끝은 안보이고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 그 터널은 굽어져 있는 터널이라는 말을 믿었거든요. 뜻만 변치 않으면 반드시 길이 보인다는 그 말을 믿었어요. 서울공업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한양대와 중앙대 연극영화학과를 목표로 공부했어요. 결국 대학 입학은 개그맨 데뷔 이후 늦은 나이에 하게 됐지만.”

-34살의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입학이 두렵지는 않았나.
“집안도 너무 어려웠고 상황도 여의치 않았어요. 중앙대에 들어가기까지 14년이 걸렸네요. 노량진 입시 학원에 다녔는데 당시에는 특별전형이 없어서 학력고사, 필답고사, 면접, 체력검사 다 보고 입학했어요. 턱걸이 19번. 100m 달리기 20명 중 14등의 기록으로 결승점을 통과했었죠. 늦게 공부한 것이 창피한 일은 아니지만 잘한 일도 아닌 것 같아요. 모든 일에는 다 적절한 때가 있는 법이니까. 학교에 입학하고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고 싶어서 학교생활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배움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요. 4년 동안 학교에서 하는 행사는 빠짐없이 참여했죠. 연극작품은 물론 엠티도 가고 졸업 여행도 가고. 당시에는 신혼 초기라 생활비를 벌어야 해서 밤일도 하러 다녔었던 것 같아요.”

-대학생 시절 해보고 싶은 일들을 다 했던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알려 달라.
“대학교에 다니게 되면 대리출석이나 미팅을 꼭 해보고 싶었어요. 특히 미팅을 정말 해보고 싶었는데 1학년 당시 이미 유부남 상태라 어쩔 수 없었죠. 지금 생각해도 많이 아쉬워요.(웃음) 수업에 빠지고 놀아 보고 싶은 로망도 있어서 수업에 몇 번 안 갔다가 교수님께 ‘한 번 만 더 빠지면 넌 F야!’ 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어요. 물론 그 이후로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공부했죠.”

-학교를 졸업한 후, 개그맨뿐만 아니라 진행자, 연기자 등 분야를 망라하고 주가를 올리게 된다. 당시 대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었는데.
▲ MBC-TV '오늘은좋은날' 귀곡산장 출연 당시.
“참 신기해요. 이덕화는 이예춘 선생님의 아들이었고 박준규는 박노식의, 전영록은 황해 선생님의 아들이었어요. 제가 스타 집안의 아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이 공동작업을 해 나간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고 감사했던 시기 같아요. 저는 정말 가난한 서민의 아들이었거든요. ‘뭐 필요한 거 있수? 없음 말구’를 외치며 ‘귀곡산장’에서 할머니 분장을 했을 때 90년대 대중들이 저에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감사했어요.”

-무대를 장악하는 이홍렬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지 궁금하다.
“그냥 ‘느낌’ 인 것 같아요.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를 무대에 올라선 ‘60초’ 안에 판단해야 하죠. 무대에 서서 이곳은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 곳인지를 판단해요. 점잖게 시작을 해야 하나, 혹은 한 사람을 지적하면서 해야 하나. 순간적인 판단이 중요하죠. 관객들의 집중도를 올리기 위해서 말을 빨리해요. 웃자고 던진 농담에 반응이 싸하다면 마치 ‘웃기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죠. 이건 오랜 무대 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체득된 거에요.”
 
-무대에 서서 MC를 보는 일만큼 다른 분야에서도 많이 활동한 것으로 안다. 어떤 호칭으로 불리는 게 가장 마음에 드는지 궁금하다.
“저는 당연히 개그맨으로 불리는 것이 좋죠. 방송하는 이홍렬, 무대서는 이홍렬이 더 신이 나거든요. 폼나는 수식어보다 개그맨이라는 고유의 이름이 좋은 것 같아요. 결국 다양한 활동들을 하게 해준 발판도 개그맨이라는 타이틀이니까. 여러 프로그램에서 MC도 많이 보았지만 결국 재밌게 방송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개그맨이 하는 일과 다른 점이 거의 없고요. 잠시 교수로 활동한 적도 있지만, 교수직은 잠시 흉내를 냈다고 생각해요. 제가 감히 교수라니. 진짜 교수님들에게 실례되는 말 아닌가요.(웃음)”
 
-강단에 선 이홍렬은 어떤 교수였는지 궁금하다.
▲ 2005년 당시, 그는 강단에 서서 오산대학교 이벤트연출과의 '아이디어 발상법' 수업을 진행했다.
“오산대학교에서 이벤트 연출강의로 겸임 교수의 역할을 맡아 5년 동안 강단에 섰죠. 학문적인 것만을 전달하는 수업이나 시험 끝나면 바로 잊어버리는 수업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보다 재밌고 기억에 남는 강의를 하고 싶었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어머니를 인터뷰하는 과제를 내는 것이었어요. 저희 어머니는 50세가 못 되서 돌아가셨거든요. 돌아가실 당시 어머니의 기록을 남길 만한 캠코더도 없었어요. 그래서 카세트를 가져와 어머니 목소리를 녹음했죠. 과거 저의 경험을 참고해 학생들에게 이색적인 과제를 냈는데 학생들의 반응도 좋았어요. 실제로 한 학생이 저를 찾아와 감사의 말을 전한 적도 있어요. 인터뷰 과제를 마치고 나서 안타깝게도 그 학생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어머니와의 좋은 기억을 남겨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듣는데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진짜 좋은 과목은 이런 과목이 아닐까 생각해요.”

-2014년에는 국토종단에 도전하여 큰 화제를 모았다.
▲ 012년 이홍렬은 '이홍렬과 함께 마음으로 걷기'프로젝트를 성공하여 남수단으로 향했다. 그는 보뤠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총 2700대의 자전거를 전달했다.
“늘 도전했던 것 같아요. 국토종단은 제 버킷 리스트에 들어있는 꿈들 중 하나였죠. 50대 끝자락으로 가던 어느 날, 스스로 깜짝 놀랐어요. 이제껏 제가 한 방송 프로그램만 세어도 100개더라고요. 세월이 언제 이렇게 흘렀나 싶어서 새로운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국토종단은 사나이의 상징이자 낭만의 꼭짓점이잖아요. 단순히 국토종단을 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기부금을 모아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완주하고 3억원의 기부금을 모았죠. 그 돈으로 2600대의 자전거가 아프리카에 보내질 때 얼마나 뿌듯하던지.”

-나눔에 대한 철학이 남다른 것 같다. 당시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함께 봉사했던 것으로 아는데.
“60대가 되니 ‘나에게 남겨진 것이 무엇일까’ 고민이 많아지더라고요. 조금 상투적인 말일지 모르겠지만 ‘나눔’이 답이라고 생각했어요. 돌아보니 저는 후원도 꽤 많이 해 왔었던 사람이더라고요. 사실 우리도 알고 보면 남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에요. 도움을 주어도 당장 내가 실질적인 보상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의 도움은 후대로 대물림 될 테니까.내가 도와준 아이들이 내 후손들과 같이 살게 될 것을 생각해야 해요. 같이 어울려 살려면 반드시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거예요. 현재 전 세계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700만이에요.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 밑에서 자라야 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로 생겨나고 있죠.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
 
-즐거운 삶에 대해서도 강연을 하신 적이 있다고.
▲ 나이 60에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집필한 이홍렬 'RE-START'열정기 『60초』
“열심히 일만 하면 놓치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은 일만해서 즐겁게 사는 방법을 몰라요. 어영부영 사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못 당하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은 즐겁게 사는 사람에게 못 당하거든요. 다른 사람들에게 꼼꼼하고 계획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인데 사실 이런 것들은 제가 즐겁게 사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죠. 한번 한 약속은 잘 지키고 남에게 민폐를 안 끼치고. 놀 때는 또 진짜 열심히 놀거든요. 즐겁게 사는 것만큼이나 행복한 일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다른 사람에게 즐거운 기억을 남긴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지난 날에 대한 회상에 잠길 때면 스스로를 위로해요. ‘웃음을 많이 주어 누군가의 마음속에 보잘것 없는 웃음비 하나라도 세워주었다’고 말이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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