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미국의 한 경제지가 꼽은 최악의 직업으로 ‘신문기자’가 선정됐다. 높은 업무 강도, 오피니언 리더 역할의 축소 등의 이유가 결정적인 작용을 했던 것이다. 과거만큼 신문기자에 대해 젊은이들이 갖는 인식이 긍정적이지 않은 상황이지만, 기자라는 직업은 ‘버텨내기 힘든’ 만큼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결코 천대받을 수 없는 공익적 직업이기도 하다. 임종건 동문은 1974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한평생 활자로 사회감시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국일보의 낙양의 지가를 올린 당사자이기도 한 그는 전국부장과 국제2부장을 거쳐 서울경제신문의 대표 이사 겸 사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인사동에 위치한 관훈 클럽에서 활동하고 있다. 
 
 
 
 
어릴 적 보고 자란 신문
평생 업으로 삼고 살게 되기 까지
 
"10년 뒤에 다시 읽어도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어떤 것을 보고 정말 ‘멋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은 곧 ‘하고 싶다’라는 의지로 이어진다. 기자는 진실을 밝히는 직업이다. 그래서 기자는 무관의 제왕이라고도 불린다. ‘필검’이라는 말처럼 펜이라는 칼을 휘둘러 악을 제거해 진실을 파헤치라는 뜻에서다. 임종건 동문은 ‘멋지다’라는 말에 이끌려 한평생을 언론계에 몸담고 살아왔다. 한 치 앞 예상 불가능한 언론계에서, 급물살에 휘청이면서도 꼿꼿이 기자로서의 신념과 사명을 고수해 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보내주신 칼럼들은 잘 읽었다. 날이 선 글들을 자주 쓰시는 것 같은데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어릴 적 초대 국회의원이셨던 큰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당선되시고 서천으로 낙향을 하셨는데 마침 저희 가족이 서천에 살고 있어서 한집에서 같이 살게 됐죠. 서천이 시골이라 하루 이틀 신문이 늦게 배달되었던 곳이었음에도, 큰아버지는 매일 신문을 읽으셨어요. 그런 큰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신문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죠.”

-그렇게 신문을 접했던 것이 신문기자의 꿈을 키우게 된 발판이 된 건가.

“큰아버지께서는 항상 신문은 좋은 것이고 신문기자는 좋은 직업이라는 말을 하시곤 했어요. 그런 큰아버지 옆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말을 믿게 되었죠. 진로를 결정하게 될 시기에 이런 성장배경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아요.”

-많은 대학교 중에 중앙대에 입학한 이유가 궁금하다.
“당시 중앙대는 신문학과가 개설된 유일한 학교였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선택해야 하는데, 신문기자가 되려면 관련 전공을 알려주는 곳으로 가야 하잖아요. 입시 가이드북을 펼치니까 중앙대학교에 유일하게 신문학과가 있었죠. 지원했더니 떡하니 합격도 되었고.”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시작한 서울생활은 어땠나.
“처음 대학에 입학해서 느낀 점은 ‘지식의 부족’이었어요. 제가 나고 자란 서천은 시골이었기 때문에 도서관 하나 없고 공부여건도 좋지 않았어요.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를 하다가 서울 소재의 대학에 들어와 강의를 들어 보니 모르는 것이 너무 많더라고요. 문학 전집이나 소설들을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학교에 다니고 보니 제가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절감했죠. 그래서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당시 책을 많이 읽으셨나 보다.
“책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요즘 대학생들은 읽고 싶은 책을 바로 사거나 빌려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여건이 좋지 않았거든요. 쌓여있던 지적 호기심을 전부 책으로 해소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외국어 공부와 번역 공부를 해 보고 싶어 난생처음 ‘타임뉴스위크반’이라는 동아리에도 들었어요.”

-타임뉴스위크반이라니. 학내 동아리인가.
“‘타임뉴스위크반’은 요샛말로 하면 세미나 같은 거에요. 국내 배포가 조금 늦었지만 타임즈라는 잡지, 시사 주간지 같은 것이 당시에 있었거든요. 뉴스위크 잡지는 가격도 비싸고 일주일에 한 번씩 나왔는데도, 저는 그것을 꼼꼼히 사서 읽으며 세계 시사상식들을 배웠어요. 타임즈 잡지의 기자는 당시 뉴스진행도 함께 맡았는데, 그 기자를 통해 시사상식과 뉴스 관련 정보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었죠.”

-이런 활동들이 기자가 되는 데 밑거름을 만들어 준 것 같다. 좋은 기자는 상식이 풍부한 기자라고 생각하셨던 건가.
“좋은 기자는 상식이 풍부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외국어도 잘해야 하죠. 나이를 지긋이 먹은 저도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무엇보다 좋은 기자는 지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에요. 저만 하더라도 학교 다닐 때는 항상 공부한 것에 대해 토론하고 의문을 제시하는 학생이었거든요. 중앙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던 것, 청룡동상과 버드나무 밑 벤치에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사색했었던 것이 생각나네요. 그러고 보니 당시 학내 사안에 대한 주제로 중대신문에 독자투고도 한 적이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은사님도 있을 것 같다.

“신문 문장론을 가르쳐 주셨던 최진우 교수님이 기억에 남아요. 대천 고등학교 선배님이시기도 한 최진우 교수님은 늘 학생들의 어려움을 나누고 소통하려고 하셨어요. 인간미가 느껴지는 따듯한 분이셨는데, 제가 한국일보 기자가 되는 것을 보고 정말 기뻐하셨죠. 돌아가실 때 주변 지인들에게 저를 살펴달라는 말까지 해주신 것을 보면 저는 총애를 듬뿍 받았던 것 같아요.”

-졸업한 후에 신문 기자와의 인연을 처음 맺은 곳은 한국일보였다.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는지.
“70년도에 졸업을 하고 74년도에 한국일보의 ‘주간한국’이라는 주간지에서 기자생활을 처음 시작했어요. 많은 취재량을 바탕으로 서론부터 결론까지 일관되게 써야 하는 피처기사를 주로 썼었죠. 정치·경제·문화뿐만 아니라 외국 스캔들 기사까지 다 제가 써야 했어요. 그곳에서 4년 동안 일하면서 참 바쁘게 지냈는데, 그 덕분인지 제 기사가 요점정리가 잘 된 기사라는 호평을 들었어요.”

-서울경제신문에서도 일하셨던 경력이 있다.
“서울경제신문으로 가게 된 것은 단순히 제 전문성을 키우고 싶은 마음이 커서였어요. 다양한 기사를 많이 써 본 저였지만 전문성을 가진 기자는 아니었거든요. 경제전문기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한국일보에 한국경제신문으로의 이적을 요청했죠. 그곳에서는 증권물가부 소속 기자로 일했어요. 박정희 정권 당시 언론탄압으로 서울경제신문이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한국일보로 다시 돌아오게 됐지만요. 서울경제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했었던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기자생활 당시 어떤 기사가 가장 기억에 남나.
“기억에 남는 기사는 2개가 있는데 하나는 한국일보 재직 당시 기획한 ‘서민열전’이에요. ‘임금과 영웅호걸들의 이야기만이 역사가 아니고 당시를 살았던 서민들의 삶 자체가 역사다’라는 주제를 담은 기사였어요. 기획 취지가 좋고 이름 없이 살다간 서민들을 발굴해 그 사람들의 일생을 쓴다는 것이 참신하다는 평을 받았어요.
다른 하나는 1981년도에 나간 새해 첫 호 기사에요. 우연히 미국 시애틀에 우리나라 태극기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알고 보니 그 태극기는 고종이 미국 외교 고문에게 선물한 태극기였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가 있다는 사실을 ‘태평양을 건너온 기쁜 소식’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실었는데, 그 기사가 계기가 되어 미국에서 그 태극기를 사오게 되었어요. 국립역사박물관에 걸려 있는 태극기를 가져오게 한 사람이 바로 저라고요.(웃음)”

-그렇다면 그때가 기자생활 중 가장 보람 있었던 때인가.
“제 기사를 통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아이가 기부금을 받아 수술을 받았을 때가 가장 보람 있었어요. 제 기사를 읽은 미국 동포들이 돈을 보내주었거든요. 선천적으로 기형적인 배설기관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새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보고 정말 기뻤어요.”

-이 아이와 박정희 전 대통령 사이에 얽힌 비화가 있다고 들었는데.
“10·26 사태로 암살을 당한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 때였어요. 제 기사로 도움을 받은 아이의 엄마가 흰 소복을 입고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 문상을 하고 있는 거에요. 반가운 마음에 인사도 하고 대화를 나눴는데 아이의 엄마가 해준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았죠. 제가 쓴 기사를 읽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켜 주었다고 하더라고요. 그전까지만 해도 박정희 대통령은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내면적으로는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죠. 신문기자 입장에서 독재와 언론탄압을 한 대통령을 미워했었지만 그 일 이후로는 대통령을 더 이상 싫어하지 않아요.”

-그렇게 열심히 일하신 덕분인지 중앙언론문화상을 수상 하셨다.

“중앙언론문화상은 중앙대학교에서 준 상이에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서울경제신문 사장으로 있을 당시에 신문사 운영을 잘한다고 소문이 났었거든요. 학교 동문들 가운데 활약이 많은 사람들을 선택해서 주는 상을 받아서 정말 기뻤죠. 모교에서 주는 상이라 더 영광스럽고 뿌듯하기도 했고요.”

-서울경제신문 사장직은 어떻게 맡게 되셨는지 궁금하다.
“논설위원실장을 맡았을 때만 하더라도 그 자리가 끝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서울경제신문에서 저를 갑자기 사장으로 임명한 거에요. 사장이라는 큰 직책을 잘 맡을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열심히 해보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열심히 일했죠. ‘흑자 없이는 정론도 없다’라는 경영철학을 가지고 신문사 재정관리를 철저하게 했는데, 그 결과 4년 내내 흑자를 냈어요.”

-당시 사원들에게는 어떤 사장이셨는지.

“숨기는 것 없이 사원들과 소통하는 사장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매달 한 번씩은 반드시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사원 이메일로 보내줬어요. 매달 편지를 받아 본 사원들은 이런 점 때문에 저를 신뢰하고 더 열심히 일해 주었던 것 같아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사장직에서 물러나셔서도 다양한 활동을 하신 것으로 안다.
“한남대학교 예우교수로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었어요. 언론계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점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었죠. 한국신문윤리위원회에서 활동도 했는데 한국신문윤리위원회 활동을 통해 국내 메이저 언론들의 잘못된 기사들을 지적하고 아이들에게 유해한 기사들을 내보내는 언론사들에 주의를 주었어요. 신문윤리강령을 지키지 않는 회사들에게 페널티를 주는 역할을 주로 했죠.”

-그쪽에서 일하시면서 어떤 점을 느끼셨는지.
“우리나라 언론계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아직까지 한국 언론계는 패거리 언론, 편향된 언론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한쪽으로 치우쳐진 애꾸눈 언론이 되면 안 되는데. 과거에는 양쪽이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 이렇게나 협소하지 않았고 오히려 서로의 가치관을 인정해주는 분위기였는데 말이에요. 그 점이 많이 아쉽더라고요. 요즘은 같은 사안을 두고도 양쪽이 정반대로 바라보죠. 한쪽으로 치우친 기사를 쓰는 사람이 개성 있고 색깔 있는 기자로 여겨지고 말이에요. 저는 이런 풍토가 바람직하다고 보지는 않아요.”

-신문산업의 쇠락이라는 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뉴스 비즈니스는 사양산업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인 상황이에요. 그러나 저는 종이신문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봐요. 신문 구독률이 높은 일본에도 인터넷은 있지만 지금도 천만 부나 찍어 발행하고 있거든요. 종이신문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어떤 방안이 있을지는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종이신문의 가격을 올리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오히려 인터넷 시대에서 종이신문은 귀중품이 될 수 있거든요. 신문이 럭셔리 아이템이 된다면 종이신문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의견은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또한 인터넷신문의 원천은 언제나 종이신문이라는 패러다임은 결코 없어지지 않으니까 인터넷신문과 종이신문의 접점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앞으로의 인생계획을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간간히 언론사 칼럼을 통해 제 의견을 내비치기도 하고, 저를 위한 집필활동에도 매진하고 있어요. 오늘 내가 쓴 글이 10년 후에 다시 읽어도 부끄러운 글일지 아닐지는 시간이 많이 흘러보아야 알 수 있는 거거든요. 과거에 쓴 제 글에 코멘트를 단 원고를 준비 중이에요. 원고의 제목은 ‘노트가 달린 임종건 칼럼’이라고 미리 지어 두었죠. 시차를 10년 단위로 두고 원고를 준비하고 있는데 현재 거의 완성 단계에 있습니다. 기자로서 살아왔던 그동안의 삶을 천천히 되돌아보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요. 원고가 곧 나올 것 같으니까 좀만 기다려줘요.(웃음)” 
 
당신에게 중앙대란?
“나를 신문기자를 만들어 준 곳이 아닐까 싶다. 어릴 적 어렴풋이 꾸었던 꿈을 선명하게 만들어준 중앙대 신문학과는 나에게 소중한 존재다. 자신이 꿈꾸는 것을 사회에 나가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요즘, 기자로서의 삶을 살게 해준 중앙대에 입학할 수 있어 대단히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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