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저씨>에서 주인공 태식이 장기밀매업자 만석을 죽이기 위해 그를 쫓는다. 차 안으로 몸을 숨긴 만석은 태식에게 차창이 방탄유리라며 쏴보라고 도발한다. 총구를 차창 한 지점에 딱 대고 끊임없이 쏘는 태식. 방탄유리에 구멍이 하나 뚫렸을 즈음에 만석은 다시 한 번 도발한다. “이거 방탄이라고, 이 병신아!” 그때 태식의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아직 한 발 남았다.”

최후의 한 발이란, 말 그대로 마지막에 딱 하나 남은 총알을 의미한다. 마지막 단 하나, 총알을 가진 이에게는 절벽 끝에서 발악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자,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에 쏠 때 가장 신중하게 되는 마지막 탄알이다. 마지막 한 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 커다란 위로가 된다. 한편으론 마지막 필살기라는 불안감이 자리하지만.

총알을 받아야 하는 상대에게 최후의 한 발은 그 자체가 ‘불안’이다. 언제 쏠지 모르는 데다 그가 전력을 다해 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쏠 것인지, 쏜다면 언제 쏠 것인지, 쏜다면 조준의 정확도는 얼마나 높은지 등에 온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후의 한 발은 가진 자와 받는 자, 모두가 팽팽한 긴장감을 갖게 한다.

최근 많은 학보사가 최후의 한 발을 꺼내들었다. 동대신문부터 서울여대학보, 삼육대신문까지 그들은 굳은 의지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거듭되는 고민 속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했으리라.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결코 아니다. 독자와의 약속,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 등이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을 얼마나 힘 빠지게 했겠는가. 같은 편집장이 아니고서야 느낄 수 없다. 아마 자신의 발 한끝 놓일 수 없는 절벽까지 밀려났겠지.

이번학기 중대신문은 그 많은 논란에도 불구, 백지로 발행되거나 발행이 연기되지 않았다.  ‘절벽 끝까지 갔으면 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건 절벽 끝까지 갔을 때 얘기다. 나는 내가 선 자리가 절벽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한순간에 평지가 절벽이 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느냐 마느냐는 온전히 내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었다.

이번학기 이 한 발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아등바등했던가. 물론 때가 오면 꺼내 들어야 하겠지만 나는 그 ‘때’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첫 번째, 한 발을 쥐고 있다는 것은 상대도 긴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거니까. 두 번째, 언젠가 심장에 조준할 타이밍이 오면 쏠 거니까. 마지막, 위로의 벽을 스스로 허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팩트에 매달리고 맥락을 갈구했으며 진실을 뒤쫓았다.

내가 평지에 서게끔 돕는 최고의 것은 진실이었다. 진실과 논리로 쌓은 도움닫기가 상대의 머리를 사뿐히 밟게 도와줬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검은 때가 덕지덕지 낀 사실로 지면을 채울 수 없었다. 한 팔로 최후의 한 발을 꼬옥 품고 나머지 한 팔로는 진실을 박박 긁어 대는, 그런 한 학기였다. 그래서 결코 이번학기에 나온 열네 번의 신문이 부끄럽지 않다.

수첩을 닫으며 신문사 문 밖을 나선다. 품을 뒤적이니 미처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총 하나 그리고 총알 하나가 있다. 나는 돌아서서 최후의 한 발을 신문사 편집국에 두고 온다. 그래서 맘 편히 나갈 수 있다. 우리에겐 아직 최후의 한 발이 남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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