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가 어느 시인의 말을 빌려 ‘인간은 인간의 미래’라고 이야기했을 때 지향해야 할 인간상을 염두에 뒀다면, 오늘날 TV에서 ‘사람이 미래’라는 말을 접할 적에는 전연 다른 생각을 품게 된다. ‘궁핍한 시대’에 상대적으로 일찍 희생당한 자들의 삶이, 아직 남아있는 자들의 미래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연상은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진다. 무엇인가 잘못되었고 그것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구조를 대상으로 하지 못하고, 이 구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개인을 적용 대상으로 삼는다.
 
  구조를 비판한다 하더라도 반복되는 비판에 대한 세간의 반응이란 ‘이제는 그만 좀 하라’는 식이 잦다. 많은 경우에 비판은 잘난 체나 히스테릭한 반응으로 격하되며 그로 인해 내심 비판에 동조하던 사람들마저 위축된다. ‘모두가 안다는 이유로 침묵을 요구하는 현실’에서 질타의 눈길은 계속 말하려는 자에게 향한다. 사태의 본질적 변화가 없는 상황을 두고 ‘이해될 만큼 충분히 접했으니 그만 말했으면 좋겠다’고 반응할 때 그러한 이해가 얼마나 불성실한 것인지 드러난다. 비판의 목적은 변화에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비판의 논리만 이해하고 변화는 고려하지 않은 채 상황을 끝내려 든다. 이런 몰이해는 보다 나은 세상으로의 변화를 꿈꿀 수 없게 만드는 끔찍한 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오랫동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일’을 본원의 용무로 인정받아왔던 ‘슬픈 학문’은 대학이 취업사관학교로 변질된 이후 끊임없이 냉대를 받으며, 한갓 도구적 기능에서만 존재 이유를 찾는 상태로 전락했다.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인간적 삶을 갈구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소비재로서의 인간 학문’이거나, 타인을 지배하거나 이기기 위한 목적으로서의 ‘도구적 이성’일 때만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제 개별학문은 취업을 위한 자격증으로 취급받고, 유·무로 판단되는 자격증의 세계에서 ‘슬픈 학문’은 일종의 ‘생각하는 방법’만을 찍어낸다. 한 시인은 그렇게 전수받은 방법이, 가치판단조차 내리지 못하는 무력한 생각으로 나아감을 보여준다.
 
  “생각 깊은 사람들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결단을 피하기 위해서 의심한다. 그들은 자기의 머리를/오직 옆으로 흔드는 데만 사용한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그들은 침몰하는 배의 승객들에게 물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살인자가 치켜든 도끼 아래서/그들은 살인자 역시 인간이 아닐까 자문한다.” (브레히트, ‘의심을 찬양함’) 
 
  무엇이 더 나은 상태인지, 혹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지 못할 때 ‘깊은 생각’은 천박한 것이 되고 만다. 어쩌면 그것은 한 개인의 비극에 그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에서 ‘침몰하는 배의 비극’과 ‘살려달라는 전화가 마지막 통화가 되어버렸던 사건’을 떠올릴 때는 작금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어떤 비판을 시작하면, 이 글의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학문이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알려주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강영신 학생
국어국문학과 석사 4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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