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긴 줄이 가장 안전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 줄에 서 있으면 최소한의 것들이 보장되던 시대였다. 어디든 4년제 대학을 졸업만 하면 안정된 직장의 사무직으로 일하며 살 수 있었다. 이름을 알만한 대학을 졸업하면 이름을 알 만한 직장을 골라 갈 수 있었다.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오면 연구원이나 교수가 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긴 줄에 선 순서대로 인생의 여러 가지 것들이 대략 정해졌다. 직장과 살게 될 집의 크기, 심지어 배우자의 선택범위까지. 그가 선 줄이 그의 인생을 배반하는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다들 가장 긴 줄에 서려고 하는 것이 당연했고, 그 줄에서 밀려나는 순간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우리사회의 엄청난 교육열은 안전한 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생존투쟁의 결과인 셈이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발전과정은 가장 긴 줄이 가장 안전하다는 철칙을 끊임없이 재확인시켜줬다. 그래서 지금도 초등학생들부터 공부에 목을 매게 만든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말할 것도 없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그의 남은 인생에서 많은 것을 규정하는데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가장 긴 줄이 가장 안전할까. 전혀 아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12년간 유년기와 소년기를 고스란히 바치게 만든 대학이 미래를 보장해주던 시대는 이미 끝이 났다. 이제 어떤 대학도 그 대학의 이름으로 학생들의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예전에 ‘먹고 대학생’이란 말이 있었다. 대학만 들어가면 공부 안하고 먹고 놀며 시간을 보낸다는 말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건, 그가 대학 4년을 어떻게 보냈건 대학 이름에 따라 누릴 수 있는 것이 있던 시대의 얘기였다. 그것이 아주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입시에 짓눌려 살아온 젊은이가 자유롭게 미래를 모색하며 보내는 시간을 소모적인 낭비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의 이름이 자신의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의 대학생들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불안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그 어느 시대보다 열심히 공부한다. 학점과 어학, 자격증, 스펙…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들어간 직장도 안정된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루카치의 탄식은 시대와 대상을 바꾸어 모두가 스스로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가야만 하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 의해 다시 메아리가 되고 있다.
 
  긴 줄의 뒤에 서기만 하면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 듯 따라 올라가지던 시대는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줄이 제일 안전하다는 미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자신만의 길과 삶의 원칙 없이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대기번호표조차 받지 못한 채 서 있는 그 줄의 맨 끝에 관성적으로 발을 들여놓는 일만큼 무모하고 위험한 일은 없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시대 앞에 우리는 서 있다.

방재석 교수
문예창작전공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