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심’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실시간 업데이트가 안 돼 있던 나는, 그 말을 ‘근부심’으로 알아들었다. 알고 지내는 이 중에 한 사람이 은근히 몸 자랑을 하는 이를 마주치면 시샘이 나는지 “근부심 쩌네” 어쩌곤 하며 불평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 말에 익숙했던 터인지 나는 군부심이란 말을 우연히 처음 듣고서는 청맹과니처럼 그를 발음이 비슷한 근부심으로 알아들었다. 그러고는 말귀 어두운 것을 탓하지는 않은 채 “근육이 어디 붙어있다고?”라며 내심 빈정댔다. 그러다 순간 군부심이란 말이 알고 있던 그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그러나 그를 깨닫고서 나는 갑절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군부심? 군대 생활을 했다는 데 대한 뿌듯한 자부심이란 것도 있다는 말인가. 군대 ‘따위는’ 가지 않은 나로서는 애초부터 군대‘씩이나’ 다녀온 자들의 마음을 전연 헤아릴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 일러스트 전은빈씨

군부심, 그들만의 포퓰리즘

  누가 들려준 이야기를 읽다 보니 군부심은 제법 정당한 윤리적 근거가 있었다. 군대를 못 가는 두 가지 이유, 병신이거나 아니면 특권층 자제이거나 하는 것과 달리 군대를 다녀왔다는 것은 두 가지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은 것이다. 사람 구실 제대로 못하는 이들과도 엄연히 다르며 그렇다고 특권을 발판 삼아 다들 기꺼이 감당하는 의무로부터 기회주의적으로 도피하는 자들과도 다르다는 것, 그것이 병역의무를 다한 자들의 윤리적 명예의 바탕이다. 그런데 몇 되지 않는 예외적인 자들과 다르다는 것이 무슨 큰 벼슬인 양 자부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나는 군부심에 ‘쩌는’ 이들이 자부심을 내세우려 들이대는 구별이 미심쩍었다.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이 자부심의 근거가 된다는 논리는 어딘가 이상하기 때문이다. 보통이라는 것이 자랑할 만한 일이라는 것은 어딘지 포퓰리즘의 악취를 풍긴다. 나는 그 악취의 정체를 얼마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포퓰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어떤 이색적이고 다른 이를 비난하고 혐오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군부심은 상당히 양면적이다. 첫 번째로 그것은 노골적으로 평등주의를 내세운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우리는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그런 특권을 누리며 안락하게 살고 있는가.’ 그런 점에서 군부심은 특권에 대한 증오에 바탕을 둔다. 이 증오는 모두가 똑같이 대접받고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사는 세계에 대한 소망을 은연중에 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비뚤어진 방식으로 그런 소망을 나타낸다. 그것이 바로 포퓰리즘의 또 다른 특징이다. ‘우리는 모두 동등해야 하는 데 왜 너(희들)는 그렇게 편하게 지내야 하느냐’는 올바른 의문은 갑자기 불평등한 삶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고 그 원망에서 비롯된 분노를 전연 상관없는 대상에게 투사한다. 정작 탓해야 할 상대를 탓하지 못한 채 모두가 손쉽게 증오할 수 있는 상대를 골라 그에 대한 공격으로 화풀이하는 것이다.

군부심으로 인한 피해자는 여성
  이런 점에서 군부심을 경쟁적으로 과시하게 된 주요한 이유인 ‘군 가산점제’를 떠올려 보아도 좋을 것이다. 군 가산점제 폐지의 수혜자는 표면적으로는 여성인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군 가산점제 덕에 그나마 군대에서 ‘X뺑이 친’ 수고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었는데, ‘여(성)가(족)부’와 ‘꼴(통)페미(니스트)’들이 난리 법석을 피우는 바람에 모두 그저 헛수고한 시간이 되었다는 것. 이런 주장은 얼핏 듣기엔 그럴싸하다. 그렇지만 군대에 다녀왔다는 이유만으로 가뜩이나 남자를 우대하는 세상에서 군 가산점 탓에 취업 기회로부터 뒤로 밀려나는 여성들의 항변은 틀린 말인가. 나는 그 주장 역시 옳게 들린다. 그렇다면 이제 싸움은 남자와 여자의 전쟁으로 비화한다. 진짜 적을 놔두고서 말이다. 군 가산점제에 애면글면 매달리게 된 이유는 빤한 것이다. 어떻게든 취업을 하고 싶다는 것이고 이를 가로막는 것은 용납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일자리를 두고 내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여자들이 아니라 그들이라는 것은 눈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당연 그들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관심이 없다. 그들은 채용을 하려는 것뿐이고 그저 취업에 지원한 이들의 점수를 셈하면 그뿐이다. 그들은 당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크게 상관이 없는 척 ‘쿨’하게 처신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닦아세울 수는 없는 일이라고 믿는다.

비난의 화살은 ‘자본가’로 가야한다.
  나는 이를 조금 어려운 말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인간 다루기 묘법(妙法)이라고 생각한다. 자본가들은 ‘수요가 들쭉날쭉한 탓에’, ‘주주나 투자자가 그렇게 하길 원하기 때문에’, ‘보다 효율적인 경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등을 운운하며 ‘너 님 맘대로’ 일자리를 줄였다 늘였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해 입도 벙긋 못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경제의 법칙이고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적과 성장을 위해 댁들이 먹고사는 문제는 알 바가 아니며 몇 푼이라도 받으면 미친 듯이 일하거나 아니면 실업을 택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고르라는 명령을 절대 어길 수 없는 철칙처럼 여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원한 감정을 애꿎은 다른 이들에게 퍼붓는다. 그렇게 손쉽게 증오를 쏟아낼 수 있는 대상은 한국 사회의 경우 공무원, 정규직, 여자 등으로 선발된다. 어느 정치인이 말해 대박을 친 표현을 빌자면 정상화해야 할 비정상적인 특혜와 부패를 누려온, 세상의 좀 벌레, 기생충, 마피아들이다.

  이런 발상에 따를 때 우리는 희한한 논리에 도달한다.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규칙에 불과한 자본주의 경제는 자연적 사실로 둔갑하고 남녀 구분 같은 현상은 얼마든지 손을 써서 바로잡을 수 있는 문화적인 사태로 전환한다. 계급 간의 불평등은 이제 그와 전연 상관없는 자들끼리의 문화 전쟁으로 둔갑한다. 철밥통 정규직의 이기주의에 대한 혐오감, 상전처럼 군림하며 해 먹을 것은 다 해 먹고 자기네들 연금이 조금이라도 축날라치면 발악을 해댄다고 보는 공무원에 대한 적개심, 예전 같았으면 남자 잘 만나 팔자 고치는 게 인생의 가장 큰 대박이라고 알고 살았을 텐데 이제는 오만방자하게 권리 운운을 떠드는 여자에 대한 증오. 우리는 가짜인 적을 겨눈다. 그렇지만 그 적에 대한 비난과 공격은 엄청난 심리적 쾌감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쾌감은 진짜 적을 어찌할 수 없다는 데 대한 무력한 좌절과 비례하게 마련이다.

남자인 척 ‘자뻑’하는 윤리적 코미디

  그렇지만 그런 현상의 한 변종인 군부심에서 제일 가소로운 점은 갑자기 남자가 남자인 척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시쳇말로 ‘자뻑’이다. 남자는 한 번도 남자인 척 겸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가부’를 성토하는 이들은 그 부처를 빼곤 모든 부처가 남성부라는 것을 모른다. 남자는 한 번도 자신을 남성이라는 성으로 이해한 적 없다. 남자란 자들은 자기는 그냥 인간 자체, 존재 그 자체인 것으로 자처하면 살아왔다. 남자는 인간이라면 여자는 특별히 ‘성’이라는 것이다. 즉 남성은 성의 한 종류로 겸손히 여성을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인 척 건방을 떨어왔다. 그렇다면 지금 남자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그 겸손한 남자란 자들은 얼마나 흥미로운 이들인가. 인간=남자에서 남자=남자인 것으로 자신을 커밍아웃하는 남자들. 그것은 너무나 측은한 윤리적 코미디이다. 그들은 평등을 원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체념한다. 그리고 그 체념에 대한 원망을 동일한 피해자인 곁의 사람들에게 겨눈다. 그것은 진짜 우습다.


서동진 교수
계원예대 융합예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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