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두 번 넘게 변하는 기간 동안 학생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졸업한 세대의 학생들과 요즘의 학생들을 자연스럽게 비교해 보는 경우가 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캠퍼스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지만, 한마디로 ‘학생’이라는 다소 모호한 집합명사로 지칭되는 객체들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굳이 그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 노력하지 않아도, 옷차림을 비롯해 그들의 말투와 행동거지 등이 이제 나이가 든 내게는 때때로 낯설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큰일 났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이 표현이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의 일방적인 전달’이라는 어감에도 불구하고, 양 당사자가 소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통한다는 것은 서로 교감한다는 것이며, 교감은 상대방의 입장과 의사에 내가 공감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제 내게는 나의 학생들과 교감한다는 것이 어느새 지난한 과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과거에 비해 부쩍 줄어들고 있는 강의시간의 질문의 빈도를 느끼면서, 그 원인이 내게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이러한 ‘나이 듦에 의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의 문제로 종종 속을 끓이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게 나만의 탓일까?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 직후,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기자회견장에서의 해프닝이 참고가 될 것 같다. 대규모 국제회의의 호스트로서 훌륭한 역할을 한 한국에 대한 답례로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의 우선권을 주겠다는 오바마의 예상치 못한 호의 말이다. 그런데 거듭되는 오바마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그 똑똑하다는 한국 기자들이 그 귀한 기회에 아무도 입을 못 뗀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다가 결국은 그 기회를 엉뚱한 중국 기자에게 빼앗기는 바람에, 그 자리의 한국 기자들은 국제적인 망신을 당한 해프닝이다. 이게 우연히 일어난 일일까? 남 앞에 공공연히 나서기를 꺼려하고 양보의 미덕을 존중하는 동양문화의 탓인가? 그렇다면 그 중국기자는 동양인이 아니었던가? 
 
  아마도 이것은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야기한 부끄러운 현상일 것이다. 나서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선생이 가르쳐주는 것만 열심히 받아 적고 암기해대는 죽은 지식의 사육장. 지난 십수 년 간 반복되어 온 그 교육현장이 이러한 상황을 야기한 주범이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가르친다는 것’은 전달자가 일방적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독특한 그 무엇이다. 설사 수백 명이 한자리에 모인 강연현장에서도 청중의 표정과 자세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있다. 그런데 눈을 마주치는 강의실에서 개개인의 개성과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활기찬 질문과 그로 인한 교감이 줄어들고 있음은 참으로 걱정되는 현상이다. 대학은 이러한 상황을 바꾸어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 같은데…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든 나는 답이 안 보인다.
 
박해철 교수
경영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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