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전시회가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높이 3m에 달하는 캔버스에 빨간색만 있는 그림에 관람객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심지어 졸도하기도 한다. 그림을 감상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숭고’하다고 말한다. 도대체 이들이 말하는 숭고의 의미는 무엇일까.

  왼쪽의 그림을 보자. 낭만주의 회화의 대표적 작품인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숭고함을 표현한 그림이다.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한 대지, 우뚝 솟은 산들 사이로 휘몰아치는 듯한 안개의 파도는 대자연의 힘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에 비해 마주선 인간은 상대적으로 그 유한성이 도드라져 보인다. 뒷모습이어서 표정을 볼 순 없지만 아마 압도와 경외의 표정을 지었으리라.

  칸트에 따르면 거대한 자연물, 혹은 인공물에 느끼는 두려움과, 경외를 통해 사람들은 숭고를 체험한다. 우리는 거대한 힘, 혹은 압도적 감각 앞에서 위축되고 작아진다. 마땅히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고 사고는 정지한다. 그러나 곧 자신의 안전한 처지를 깨달은 후에는 억눌렸던 감정이 반동으로 튀어 오르게 되는데, 이때의 희열감에서 우리는 숭고의 감정을 느낀다. 즉, 숭고는 불쾌와 고통의 감정이 쾌감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말한다.

  이는 ‘상상력’과 ‘지성’이 갈등하는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상상력은 눈앞의 대상에 대한 정보를 머리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지성은 이를 정리해 하나의 ‘표상’을 만든다. 대상을 직접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게 말이다. 그러나 숭고의 순간 상상력과 지성의 조화는 깨지고 표상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휘몰아치는 안개구름 앞에 망연자실하듯 말이다. 일종의 기능정지가 발생한다. 여기서 주체는 마비된 지성을 대체할 인식 수단으로 ‘이성’을 사용한다. 비록 지성으로는 좌절했지만 이성이라는 능동적인 정신활동을 확인하면서 주체는 감정적으로 고양되며 감동을 느낀다. 숭고의 순간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자 위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와는 다른 모습의 작품들이 숭고 미학의 기치를 이어받는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 그 대표적인 예다. 단지 몇 개의 네모들이 겹쳐있거나 캔버스 위아래로 두 개의 색만 칠해져 있는 식이다. 어떻게 숭고의 감정과 연결되는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앞서 지성과 상상력이 부조화를 이룰 때 숭고의 감정이 생긴다고 했다. 즉, ‘거대한 크기와 엄청난 힘’을 표현할 적절한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보여줄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은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애초에 나타낼 수 없는 것이라면 ‘표현할 수 없다’는 표현을 통해 대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오히려 관람자는 어떤 그림인지 파악하긴 힘들어도 역설적으로 그 의도나 느낌은 더욱 직접적으로 전달받을 수 있다. 마크 로스코 전시회에서의 관란객들처럼 말이다.

  마크 로스코 그림에 관한 일화가 있다. 아이를 잃은 한 여인이 그의 그림을 보다가 통곡을 하면서 마크 로스코가 곧 죽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얼마 뒤 마크 로스코는 손목을 그어 자살을 한다. 그녀는 그림에서 그의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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