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억압의 시대 아냐
능동적으로 발전에 참여하는
‘통치의 참여자’로 호명된 국민

 

 좋든 싫든 우리는 박정희의 ‘유령’과 더불어 살고 있다. 근 수십 년간 그래왔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여기서 유령이라 함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존재를 이른다. 딱 박정희가 그렇지 않은가.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너무 많은 곳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적으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에 맞닥뜨리곤 한다. 생물학적으로 그는 죽었지만 상징적으로는 건강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유령은 허상에 불과한 것일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니 무시하면 될까. 아니면, 어떤 영향도 행사하지 못하게 ‘귀신아 물렀거라!’하면서 내쳐야 할까. 망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허깨비에 놀아나는 무지렁이’라고 내몰면 그뿐일까. 문제는 세상사가 순리대로,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돌아가지만은 않는다는 데 있다. 그의 유령을 불러내는 소환술은 어떤 과학조차도 꿰뚫을 수 없는 강력한 주술성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령이, 그리고 유령에 홀린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 시절, 나는 의미있는 존재였다
 그런 까닭에 관점을 바꿔볼 필요도 있다. 박정희 신화에는 경제 성장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매력, 또는 물질적 풍요와 필연적으로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정신적 매력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에둘러보겠다. 1960~70년대 엄청난 노동강도와 저임금에 시달리면서도 자기 가족과 국민 경제를 위해 희생을 감내했던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한국 경제가 고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굳이 청년 전태일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당시에 성취한 ‘금준미주’와 ‘옥반가효’가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천인혈’이자 ‘만성고’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피복 공장의 노동자나 파독 광부 또는 간호사로, 또 때로는 개발도상국의 농민이나 도시빈민으로 살면서 성장의 뒤안길에 머물러야만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상당수가 지금보다 “박정희 시대가 더 좋았다”고 회고하곤 한다는 것이다. 분명 물질적 분배 체계에서 억제되거나 배제됐던 때일 텐데 왜 그 시절이 더 좋았다는 것일까. 여기서 확실한 것은 박정희와 그 시절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은 단순히 경제적·물질적 차원으로 소급시킬 순 없다는 점, 그런 맥락에서 사람들의 주관적 감정과 의식 상태에 대한 참조가 필수적이라는 점, 나아가 그에 대한 과학적 해명을 시도하는 한 그들의 향수를 단순한 허위의식의 소산으로 폄훼할 순 없다는 점 등이다.

 어쩌면 ‘더 좋았다’는 건 경제적 복리 같은 것과는 아예 다른 차원이 아니었을까. 예컨대 ‘막장 인생’인 줄로만 알았던 광부들에게 어느 날 대통령이 찾아와 임금이며 복지며 후생에 대해 물어보고 그들을 국민경제의 ‘산업 전사’로 불러준다면, 지금의 우리라도 복잡한 감정이 들지 않았을까. 달리 말해, 박정희에 의해 ‘의미 있는 존재’로 부름받고 인정받았다면 말이다. 다른 어떤 직업, 혹은 직업이 없어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겐 그들 나름대로 존재론적 근거가 명확했던 것으로 술회 되곤 한다. 만약 이들이 오늘날에 와선 존재론적 소재지를 상실했다면, 정확히 말해 의미 있는 존재로 부름받지 못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분명해진다. 지금이 그때보다 좋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자유로웠던 억압의 시대
 그런 맥락에서 박정희 시대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태껏 진보적 지식인들이 기술해왔던 것과 달리, 국왕-가부장으로서 권위를 발산하던 대통령과 그의 살뜰한 부름과 보살핌을 받는 평등한 국민들로 이뤄진 세계를 ‘억압적’이라고만 치부할 순 없기 때문이다. 억압받았는데 행복했다면 둘 중 하나 아니겠는가. 그들이 변태이거나, 아니면 실제론 억압이 아니었거나.

 특히 이 시기의 국민 개조와 사회정책 문제는 단순히 독재 구축을 위해 ‘말 잘 듣는 국민’을 규율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폄하하기도 어렵다. 이런 이해방식은 당시의 국민들을 예속적이고 복종하는 인간으로만 묘사할 뿐인데, 이미 몇몇 역사학적 증거들에 의하면 당시 국민들이 비할 바 없을 정도의 능동감 또한 지니고 있었음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 등을 통해 실현된 ‘근면·자조·협동’의 국민 참여 및 동원은 그래서 더 주목할 만하다.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 마을공동체가 정비되고 발전하는 모습을 봤다면 그 성취감은 평생에 걸친 자기 서사에 있어 가장 찬란한 순간으로 기록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예컨대 1968년 정신적인 면에서의 ‘개조’를 내걸고 등장했던 ‘제2경제론’ 역시 단순히 경제적 발전을 보조하기 위한 밑바탕 이상의 것이었다. 당시까지 진행되었던 재벌 주도형 발전주의 드라이브와는 달리, 새로운 이데올로기적인 가치를 통한 사회체제의 형성을 의미하는 가능성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제까지 요구되던 인간형이 생산 라인에 붙어 있는 금욕주의적 인간으로서 ‘산업 전사’였다면, 이 시기에 이르러선 ‘새마을지도자’든 ‘부녀회원’이든 이러저러한 ‘완장’(≒ 자기 확신)을 가지고 생활 전선에서 자기 스스로 지역공동체 또는 민족공동체의 발전에 참여하는 인간형이 요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나를 불러주었기에 가지게 되는 상징적 능동감을 넘어서는 수행적이고도 실질적인 능동감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더 이상 통치의 객체로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사회적 동원 과정에 의해서였던 무엇에 의해서였던 통치의 참여자로서 자기 위치를 격상하는 경험을 했던 것은 아닐까. 만약 누군가 박정희를 여전히 향수하고 그 시절로부터 헤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서만 그런 건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는 과거보다 현재에 와서 더 예속적 체험을 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지금 우리는 ‘박정희 이후’를 살고 있나
 물론 이렇게 창출된 ‘좋았던 시절’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만들기도 했다. 국민으로 개조된 덕분에 적잖은 사람들은 ‘민족중흥’이나 ‘인류 공영’ 등으로 제 스스로를 연결해 공적 주체가 되었고 그 결과 유사 이래 비견할 바 없는 정치적 에너지를 분출하기도 했다. 또한 새마을운동을 비롯한 이 시기의 사회 정책 체계는 시민사회의 역량 강화라는 트로이의 목마를 끌어들이기도 한 것이었다. 단기적으론 통치의 비용을 동원된 국민들에게 분담 또는 전담시키는 성과를 거뒀지만, 장기적으론 통치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시민사회의 역량을 신장시킴으로써 국가 권력 및 능력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자초했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날 그 효과는 다소 불균등하게 나타나고 있다. 민족주의의 시효가 마감됨에 따라 과거와 같이 보편성을 담지한 공동체적 범주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고, 따라서 정치적·경제적 전망에서 공적인 것을 불러내는 것은 점점 더 소원한 일이 되고 있다. 그에 반해 자본과 시민사회의 역량은 날로 강해져 오늘날 국가 권력은 오로지 민관 파트너십 같은 것을 통해서만 통치의 불가능성을 돌파하는 게 가능해지고 있다. 요컨대 사회를 한정시켜줄 범주가 불확정적인 가운데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진) 시민사회의 재량은 불어났다는 것이다. 지금의 이 상황이 오늘날의 정치를 어떤 지평으로 이끌게 될지는 실로 예측하기 어렵다.

 어쨌거나 우리는 박정희 시대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망령을 떨쳐내려는 ‘씻김굿’이 언제나 실패하는 이유는 그 시대에 돌출했던 ‘공동체 효과’를 대체하지도 추월하지도 못하는 패착 때문이지 않을까. 물론 ‘그때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정치적 퇴행은 그 자체로 문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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