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대학은 꿈을 꾼다 - 중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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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대학은 꿈을 꾼다
심우삼 기자  |  wu32@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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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11  11: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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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었다

 취업 걱정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꼰대들도 지금의 젊은이들을 보고 ‘참 가엽다’고 할 때가 있다. 적어도 이때만큼은 ‘나 때는 먹고 대학생이어도 취업하기 참 쉬웠는데’라고 운을 떼면서 말이다. 공부만 하던 놈들을 시대의 반역자라고 욕했던 그때, 그렇게 싸우고 놀았는데도 먹고 사는 문제에 발목 잡히지 않았던 그들의 대학 생활에선 역으로 우리들이 꼰대다. 그들의 대학 시절은 어땠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자유롭지 않았지만 자유로웠던 시대였다.”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유홍식 교수(중앙대 신문방송학과 86학번)는 대학 시절을 떠올리며 말한다.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는 고립되고, 언론은 통제된 시대였지만 대학 내에서만큼은 자유가 있었다. 그 당시 대학은 자기가 하고 싶은 활동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것의 답을 얻기 위한 끊임없는 생각들, 많은 책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자유가 만들어준 빈 공간을 채웠다. 취업에 치여서 영어점수에 신경 쓰고 해외연수에 돈을 쓰며 인턴 지원에 목을 매는 것은 이전의 시대에서 볼 때 첨단을 달리는 풍습이었다. 자기계발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자기계발이었다. 목적이 아니라 호기심이 자기계발의 동인이었다. 
 
  서호천씨(고려대 건축학과 77학번)가 자취방도 빼버리고 도장에서 친구들과 같이 살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친구 8명과 함께 살며 도장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저 하고 싶은 태권도를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고민도 없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었다. 단지 태권도를 통해 육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수양하는 것이 참 좋았다. 그래서 태권도에 빠져 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인생의 낙오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모두가 각자 번듯한 자신의 몫을 해내며 사회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유홍식 교수는 서예만 하기도 바빴다. 중앙동아리 ‘중앙서예연구회’에서 썼다는 그의 호 ‘현죽’ 휘호가 이를 증명한다. 고등학교 당시 잠깐 하던 것을 대학교에서 이어 한 것이다. 물론 동아리에서 서예만 한 것은 아니다. 사실 사람 만나는 것이 더 좋았다. 동아리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췄다. 천원이면 소주 두 병, 새우깡 봉지 하나 들고 놀았다. 학교 앞 어머니 집 같은 허름한 파전집에서도 내리 놀았다. “남들이 해야 한다고 하니까 따라가는 시대가 아니었어요. 친구가 영어 공부하면 ‘그래, 넌 그거 해. 난 딴 거 하고 놀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였죠.” 그의 친구는 연극 동아리 ‘영죽무대’에 빠져 살았다. 지금은 국내에서 이름만 대면 아는 연출가가 됐다. 참 어딘가에 미쳐있는 친구들이 많았다고 한다. 연극에 미친 친구는 신방과 내 연극학회 ‘또아리’에, 드럼과 기타에 미친 친구는 중앙동아리 ‘블루드래곤’에 빠져 살았다.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시대였다.
 
  이들에게는 ‘불안’이라는 것이 없었다. 밥을 먹으며 취업 얘기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취업 얘기를 하고 술을 먹으면서까지 판에 박힌 취업 얘기를 하는 지금 청년세대의 불안과 비교하면 말이다. 판에 박힌 불안 대신 ‘참 즐거웠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경영학부 이관영 교수(중앙대 경영학과 90학번) 역시 대학 생활이 즐거웠다고 한다. ‘카보’라는 볼링 동아리를 하면서 주중에는 당구도 치고 주말에는 볼링도 치며 대학 생활을 즐겼다. 2년간 일본어 및 영어 학원을 다닌 것이 4년 대학 생활의 유일한 자기 계발이었다. 물론 이도 취업 때문이 아니라 정말 배우고 싶은 외국어였기 때문이었다. 
 
  졸업을 하면 대부분 취업이 됐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청년세대의 불안은 없었다. 이들 기성세대가 대학을 다녔던 시대는 취업하기 어려운 시대가 아니었다. 지금보다 대학 수도 훨씬 적었고, 대학생의 수도 적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토익점수나, 자격증, 인턴 대신 ‘추천서’라는 것이 있었다. 대학생이란 신분만으로도 기업에 추천되는 시대였기에 추천이란 것이 가능했다. “단과대에 항상 기업 추천서가 들어왔어요. 순번을 정해서 추천서를 받으면 해당 기업에 가서 면접을 보는 식이었죠.” 심준식씨(건국대 경영학과 83학번) 역시 당시 롯데그룹의 추천서를 받아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 준비랄 것도 없었다. 양복 입고 단정하게 가는 것이 면접 준비의 전부였다. 아직도 당시 면접이 기억에 남는다. “회사에 들어오면 열심히 할 수 있어?” “네,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이후 몇 개의 질문이 면접의 전부였다.
 
  지금은 어엿한 회사의 임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연석씨(서강대 경제학과 79학번)는 “4.0 만점에 평점 2.7이면 웬만큼 좋은 기업은 다 갈 수 있었어요”라고 말한다. 토익점수·대외활동 같은 것이 취업에 중요한 척도가 아니었다. “토익점수가 몇 점이냐 그런 건 따지지도 않았어요.” 3~4학년 때 학점이 좋으면 괜찮은 회사에 취업하는 것이고 그보다 낮으면 조금 작은 회사를 들어가는 것일 뿐 취업을 못하는 상황은 없었다. 
 
  취업에 열중해야 할 시기에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조재희 교 수(서강대 신문방송학과 96학번)는 3학년 2학기부터 4학년 1학기까지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한 학기에 한번 본 공연이 있었다. 본 공연은 며칠 동안이나 진행됐고, 이를 준비하는데도 많은 노력과 수고가 필요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거부감이 없었다. 1,2학년이 아닌데도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취업에 관해서 압박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스펙이라 한다면 제가 동아리에서 한 공연 같은 것이 스펙이었어요. 면접관들이 토익점수나 자격증이 아니라 내 연극에 대해서 물어보던 때였죠.” 자신이 하는 일이 곧 스펙이었기에 스펙을 위해 무언가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제대하고 난 뒤에야 이름 있는 광고회사 입사에 공모전의 수상경력이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보편화 되지는 않았지만 98, 99학번 학생들은 공모전을 준비하기도 했어요”라며 조재희 교수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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