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우는 여인>은 보기 불편한 그림이다. 깨진 눈동자와 과장된 눈물, 입을 틀어막는 손에서 그녀가 느끼는 절망이 전해진다. 무엇보다 조각조각 해체돼 마치 짜부라진 듯 보이는 얼굴은 울음이 격하게 일렁이는 모습처럼 보인다.
 
  이 그림은 실제로도 ‘보기’ 불편한 그림이다. 여인의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한눈에 와 닿지 않는다. 하나의 시선에서 관찰한 모습을 표현하지 않고 여러 시선에서 본 여인의 모습을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큐비즘(Cubism)을 통해 창조된 이 여인은 그래서 못생기고 낯설게 보인다.
 
  르네상스 이후 기존의 회화는 철저한 원근법에 따라 구성됐다. 원근법 이론을 정립한 알베르티는 원근법의 정밀성을 측정하기 위해 ‘창문’을 이용한다. 물체의 각 모서리에 실을 매달아 그 실들을 화가의 눈 쪽으로 모으고, 중간에 창문을 두어 위치하는 실들의 윤곽을 잇는 방식이다. 3차원을 그대로 평면에 옮긴 것이다.
 
  문제는 실들이 모이는 곳, 시점이 하나로 고정됐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의 시선은 하나가 아니다. 두 개의 눈이 초점을 맞춰 대상을 인식한다. 애초 시점이 두 개인 것이다. 또한 알베르티가 전제하는 창문은 평면이지만 인간의 망막은 둥글다. 애초 우리는 대상을 그대로 인식하지 않고 어안렌즈와 같은 곡면을 통해 인식한다. 사실적이라 여겼던 원근법이 무너지는 지점이다. 원근법의 맹점은 우리의 시점이 실들이 모이는 점과 같이 하나로 고정돼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미(美)’를 인식하는 우리와 닮았다. 어떤 외모여야 한다는 ‘고정된 시점’으로 대상을 보는 현실 말이다. 미남상, 미인상의 조건 짓는 특정한 이목구비의 모양들은 이 시점을 고정하는 실의 가닥들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알베르티의 원근법은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유럽을 휩쓸었다. 마찬가지로 현대에서 미디어는 이상적인 외모상을 매우 성공적으로 선전하며 맹위를 떨친다.
 
  <우는 여인>의 이 ‘못생긴’ 여인은 기존의 원근법과 함께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고정된 미의식을 공격한다. 만약 미적 기준에서 피카소의 큐비즘을 수용한다면, 진정한 미는 ‘아름다움’의 의미와 가깝지 않을까. 다양한 ‘개체성’을 포용하면서 다른 것들과 조화하는 아름다움은 고정된 시점이 아닌 다시점이다.
 
  그림에서도 그 맥락이 담겨있다. 다양한 시점을 담은 각각의 조각들이 조합을 통해 여인의 감정을 절절히 전달한다. 누가 이 여인을 못생겼다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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