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에서 작업을 마치고 씻어 말린 채색 붓들을 가만히 쳐다보니 형형색색 예쁘다. 오랜 기간 거친 호분과 분채들을 칠하면서 닳은 붓털에 빨주노초파남보 색들이 자연스럽게 배어들었다. 털이 빠져 듬성듬성한 붓에 배인 색들이 깊다. 오랜 시간 남을 위해 헌신해 온 사람의 인고의 시간이나 사랑의 빛깔이 있다면 저런 색일 것이다. 동양화의 채색 붓을 오래 쓰다 보면, 그 붓 모양이 처음엔 통통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털이 마모되어 가늘게 변한다. 오랜 기간 토굴에서 수행을 막 끝낸 스님처럼 수척하다. 원래는 채색 붓을 다 쓰고 나면 버리다가 몇 해 전부터는 닳아버린 붓도 선 붓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런 붓으로 선을 그으면 자연스러운 파필의 거친 맛이 난다.

 화가는 그림에서 한 소식을 얻기 위해 수많은 붓질을 한다. 오래 긋다 보면 붓질의 무게가 선에 묵직하게 담긴다. 그 경지는 가본 자만이 안다. 예술은 감각으로 사유하는 것이기에 예술가는 자신이 살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감각으로 드러내야 한다. 요즘 들어 부쩍 느끼는 것이지만 붓질의 감각으로 세상을 보면 그 속살이 가끔 보일 때가 있다. ‘일이관지’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림 길을 걸어오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삶의 본질을 파악하는 날카로운 시력은 필수라 치고, 이를 구현할 기량에선 선을 긋고 형태를 잘 그리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화에서 선과 형태는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다만 필묵이 자연스럽고 유창하려면 판소리에서 고수가 창자의 길을 여는 것처럼 형태가 길 안내를 잘해야 한다.

 수묵화는 피겨스케이팅과 같다. 피겨 스케이팅은 음악이 흐르고 거기에 맞춰 미끄러운 얼음판 위에서 넘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작은 기술과 큰 기술을 구사해야 한다. 수묵화도 먼저 종이 위에 마음속으로 그림을 먼저 그려놓고 그 길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는 도중에 붓은 세웠다 뉘었다, 모았다 깼다, 빨랐다 느렸다, 길다 짧다, 굵다 가늘다를 반복하면서 리듬을 타고 그림을 완성한다. 모든 것은 직관에 의해 한꺼번에 이뤄져야 한다. 얼음판 위에서 넘어지면 안 되는 것처럼 그림에서도 붓질을 잘못하면 그림을 망친다. 이를 두고 한국화는 공간의 예술이자 시간의 예술이라고도 한다.

 피나는 노력을 통해 터득한 감각으로 세상을 보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음식점에 가서 음식 맛을 감별하거나, 노래를 들을 때 누가 이 시대 최고의 가객인가 서열을 매기거나, 백화점에서 옷을 사거나, 심지어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할 때도 필묵의 감각을 넣었다 빼내면 얼추 답이 나온다. 높은 감각의 세계에 닿기 위해 제자들에게 긴 호흡의 공부를 요구할 때가 있다. 만 장의 크로키와 사군자 창작이다. 모든 제자들이 좋은 작가가 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지루하고 힘든 사막 같은 험로를 온몸으로 뚫고 나가는 제자들을 빼곤 말이다. 닳은 붓이 아름답다.
 
김선두 교수
한국화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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