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철학자 중 의사소통과 공론장 이론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는 위르겐 하버마스일 겁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의사소통이론 전문가는 속된말로 언청이로 알려진 구순구개열의 장애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신체적 장애는 그의 연구에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눌한 발음도 그의 끊임없는 토론을 막을 수는 없었죠. 여전히 현역으로 읽고 쓰고 토론한다는 점에서 그가 실천하는 지식인이라는 데에 반기를 들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과거 중세시대의 일반 대중들이 썼던 어휘는 600단어 정도라고 합니다. 그만큼 당시 사람들의 인식과 소통에는 제약이 있었겠죠.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인 것만은 아닙니다. 언어는 우리의 생각의 틀을 규정하는 인식의 기준이 되죠. 우리가 늘 꿈꾸는 인식의 자유로움은 언어의 자유로움 없이는 불가능하죠. 그렇다면 우리의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은 서로의 인식과 의견을 소통하는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모든 언어행위가 직접적인 상호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의사소통행위인 것은 아닙니다. 물건을 팔기 위한 언어행위, 강의실에서의 일방적인 교육, 자신의 진심을 상대방에게 보이기 위한 언어행위 등에서는 직접적인 상호 이해는 부가적인 기능으로만 작동하는 거죠. 반면에 의사소통행위는 사람들 간의 직접적인 상호 이해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하버마스가 말하는 진정한 의사소통이란 무엇일까요? 하버마스는 네 가지 정도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네 가지 기준>
1. 화자는 청자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해 가능하게 말해야 함(이해 가능성)
2. 논리적으로 참인 명제여야 함(진리성)
3. 상대방이 생각하는 규범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함(규범적 정당성)
4. 말하고자 하는 바가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설득해야 함(진실성)
 
 
 어떤 사람의 주장이나 의견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밀실에 있는 주체의 언어는 그래서 소통이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소통은 늘 호통이 되고 마는 겁니다. 상대방이 그 주장을 인정해 줄 때만 의사소통의 의미를 갖는 거죠. 하버마스가 ‘상호주관성’이라고 부르는 개념은 바로 이런 모두가 이해하고 구분해 수용하는 공통의 인식조건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활발히 이용하고 있는 SNS에서의 소통은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 걸까요? 무너진 공론장의 회복을 위해, 보편적 가치들에 입각한 진실과 진실, 진심과 진심의 소통을 위해선 자신까지도 비판하고 성찰할 수 있는 비판적 이성이 힘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늘 화자인 동시에 청자가 되곤 하니까요.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