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들의 예술, 키치문화
진정한 예술의 의미는 무엇일까


  지난해 잠실 석촌호수에 러버덕이 ‘떴다’. 호수에 둥둥 떠 있는 대형 고무 오리는 어쩐지 비현실적이지만, 곧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빵빵한 부피감은 그 자체로 보는 이를 벅차게 만든다. 플로렌타인 호프만은 사랑과 희망을 전달하기 위해 러버덕을 띄웠다고 했다. 전이가 잘 된 탓일까. 약 500만 명의 관람객이 러버덕을 구경하러 석촌호수를 찾았고 덕분에 제2 롯데월드 매장의 매출은 20퍼센트 이상 상승했다. 이쯤 되면 헷갈린다. 이 커다란 고무 덩어리, 감성을 자극하는 ‘예술품’일까 자본을 위한 ‘상품’일까.

  피카소의 추상화보다 러버덕이 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이미 ‘키치’예술의 향유자다. ‘조잡한 물건’이라는 뜻의 키치는 유치하거나 대중적이라는 특징을 띈다. 그 특징대로 키치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서양 고대 건축양식을 띄고 있는 싸구려 모텔에서부터 티셔츠를 장식하는 체 게바라의 얼굴, 이발소에 걸린 <이삭 줍는 여인들>들까지 다양하다. 키치가 일상에 범람하는 까닭은 대중이 원하기 때문이다. 최근 영화 <킹스맨>이 히트 친 이유도 이미 클래식이 된 007시리즈의 무거움을 B급으로 가볍게 변주시켜서가 아닌가.

  키치는 19세기 시민사회와 함께 등장했다. 그전 전통적 귀족사회에선 ‘진짜’ 예술품들만 존재했다. 수십 년의 시간으로 조각된 대리석 장식, 세밀한 장식의 값비싼 보석 등은 귀족들만의 전유물이었다. 당시 시민계급인 부르주아들은 예술품을 감당할 재력도, 욕구도 없었다. 산업혁명은 부르주아를 경제적·정치적 상층 계급으로 올려놓았고, 이들은 기존의 귀족 계급이 향유하던 예술을 따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중에서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소시민들(쁘띠 부르주아)은 아직 경제적으로 여력이 되지 않았다. 이때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모조품이다. 마치 상류층의 소비를 모방해 ‘짝퉁백’을 사는 현대인처럼 말이다.

  이러한 키치 현상은 예술에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무는 역할을 한다. 예술이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킨다고 하지만 일상에 예술이 쉽게 녹아들기란 여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대중이 문화의 향유자로 등장한 현대 사회에서 키치 예술이 주류가 된 것은 자연스런 결과다.

  그중에서 제프 쿤스(Jeff Koons)는 키치 예술의 선두에 서있다. 행사장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강아지 풍선이 그의 손을 거치면 예술이 된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진 그의 ‘풍선 개’가 경매에서 626억에 팔리면서 그는 ‘살아있는 가장 비싼 미술가’로 등극했다.예전에는 잡동사니였던 물건들이 버젓이 작품이 된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되는 세상이다. 힘 빼고 감상할 수 있기에 마음은 편하지만 이 시점에서 질문 하나가 슬며시 고개를 든다. 모든 것이 예술이라면 결국 예술은 아무것도 아니란 뜻이 아닌가. 러버덕처럼 빵빵하게 부푼 예술의 포화가 언젠가 빵! 하고 터져버리는 건 아닐까.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