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땅에서 바로 서기 위하여
  • 정석호 기자
  • 승인 2015.04.12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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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회 게르마니아

  제176회 게르마니아 막이 올랐다. 올해의 컨셉 ‘미래의 고전’이라는 실로 엮는 두번째 구슬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철학이다. 『쓰레기가 되는 삶』, 『부수적 피해』,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를 번역한 정일준 교수(고려대 사회학과)가 바우만의 사상에서 ‘유동적 현대의 비판사회학’을 주제로 강의를 열었다.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와 뒤숭숭해지는 마음을 어루만지듯, 불안정한 현대인의 삶을 진단한 바우만의 철학이 더욱 뜻깊게 다가왔다.

▲ 바우만을 설명하면서 정일준 교수는 현재를 쓰나미가 밀려오는 상황이며 그 위험성을 인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진 이효석 기자

확실한 것이 없는 ‘유동근대’
현실적인 유토피아 구성해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지그문트 바우만. 올해로 91세의 나이지만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그는 거의 매년 새로운 책을 펴내며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저서로 『유동근대』가 있다.

  ‘유동근대’는 액체의 특성을 근대에 대입한 것으로, 고체와 같았던 과거의 구조, 제도가 현대에 와서 유동적이고 통제가 어려운 방향으로 변화했음을 드러낸다. 이미 시장기능의 확대와 국가기능의 축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변하고 흐를 것을 요구한다. 다시 ‘고체근대’로 굳어지려는 성질 또한 용해돼 버렸다. ‘단단함’은 이미 고지식하고 시대착오적인 성질로 치부된 지 오래다. 유속은 계속 빨라지고 중심잡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대학에 입학하니 학과는 통·폐합되고, 기업에선 비정규직을 해고한다. 은퇴를 해도 노년이 보장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확신할 것인가.

  바우만의 글은 여타 철학서와 다르게 문장 하나하나가 어렵진 않다. 쉬운 언어들로 가볍게 구성돼 있다. 근데 두 번, 세 번 읽을수록 의문이 깊어진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실체를 파악할수록 그 무게를 체감하게 된다.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사뿐사뿐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책을 쓴다.

  정일준 교수는 바우만을 ‘시인’으로 비유한다. 바우만은 마치 시인이 시의 구조에 맞게 언어를 짜 맞추고 조직하듯이 이야기를 구성한다. 다양한 사회 주제를 자신만의 어법에 맞게 재구성하는 것이 그의 독특한 저술 방식이다. 읽다 보면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되곤 하는데 각각의 이야기가 다양한 주제들과 결합하면서 각기 다른 의미로 변주된다. 결국 바우만의 저서를 제대로 독해하기 위해서는 박학다식해야 한다. 세부 내용뿐만 아니라 책의 전체적인 구성과 주제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우만의 생애
  바우만에 대한 이해는 과거 삶의 궤적과 당시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으로 2차 세계대전 시기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도피한다. 소련군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가담한 바우만은 장교로 근무하지만 그의 부친이 이스라엘 대사관에 접촉한 일이 문제가 돼 군에서 불명예제대를 하게 된다. 제대 후 바르샤바에서 사회학 강사로 재직하던 바우만은 1968년 일어난 반유대주의로 시민권을 포기하고 이스라엘로 간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도 적응하지 못해 영국으로 건너가 리즈대학에 안착하게 된다.

  폴란드 유대인 출신이라는 것은 바우만의 철학에 있어 중요한 참조점이다. 바우만의 철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새로운 이상사회, 즉 유토피아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부분을 짚곤 한다. 그러나 이는 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비판이다. 군대, 조국, 심지어 유대인 공동체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겉돈 지식인으로서 그는 주류 지식인·정치인들의 실천 모형 이론들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밖에 없다. 그들이 말하는 이상사회의 어두운 면, 부작용을 생각하는 눈을 갖춘 셈이다.

포스트모더니티와 유동근대
  바우만에게 포스트모더니티는 기존의 모더니티를 넘어서는 새로운 단계가 아니다. 단지 기존 모더니티를 지속적으로 비추는 ‘반영(Reflection)’일 뿐이다. 마치 삶의 의미가 죽음이라는 하나의 ‘단계’를 통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하루를 정리하는 잠자리에서 규정되듯 말이다. 여기엔 모더니티를 넘어서는 유토피아가 있다고 유혹하는 선동가들에 대한 바우만의 비판이 함의됐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모더니티 안에서 무엇이 변화됐는가. 기존의 ‘고체근대’가 녹아버린 ‘유동근대’만 있을 뿐이다.

  유동근대의 속성을 보여주는 저서로 『쓰레기가 된 삶들』이 있다. 쓰레기란 무엇인가. 돌을 깎아 조각상을 만들 때 돌의 일부는 작품이 되고, 나머지는 쓰레기가 된다. 여기서 본질적으로 작품과 쓰레기는 다르지 않다. 마치 먹은 음식은 밥이 되고 남긴 것은 쓰레기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이야기를 청년실업 문제에 적용하면 바우만의 시각이 드러난다.

  최근 비정규직 청년실업이 발생한 이유를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른 노동의 유연화 때문이라고 명확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유연한 시장, 기업 친화적인 국가, 혹은 유동적인 삶을 추구하는 개인 등 서로가 복잡하게 얽히고 녹아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순수한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하긴 어렵다.

  이처럼 현실은 확실한 것 없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동근대’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둑이 터진 상황과 같다. 사회적 틀을 구성해왔던, 그동안 안전하다고 믿어왔던 둑이 무너지면서 단단하게 고정된 것을 찾을 수 없는 현실이다. 믿어왔던 국가에 기댈 수는 없다. 국가는 기업의 편의대로 법률을 제정한다. 권력은 더 이상 국가의 고유 권한이 아닌 것이다.

  유동근대의 또 다른 특징은 사적영역의 공적영역 침범이다. 사적영역이 빅브라더에 의해 잠식당할 것이라는 비판이론가들의 우려와 달리 유동근대에서 미디어는 어느새 개인사적인 이야기 투성이다. 연예인들은 24시간 개인사를 늘어놓고, 정치 평론가들은 웃으면서 용산이 북한의 핵미사일로 쑥대밭이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유동근대에서 인간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가벼운 관계를 선호한다. 그러나 사실 인간관계는 인터넷에서의 ‘클릭질’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소통과 시간을 통해 가치를 쌓는 과정이 유동근대에서는 철저하게 무시된다.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그리고 세월호
  바우만의 저서 중 가장 유명한 것이 89년에 나온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다. 이 책은 홀로코스트가 역사적으로 특정 민족의 과거사가 아닌 모더니티의 산물이며, 현대에서 살고 있는 한 이런 비극은 끊임없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책의 매 행간마다 운다’고 묘사될 만큼 바우만의 진지한 고뇌를 통해 완성한 저작이다.

  정일준 교수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이미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바 있다. 세월호 참사를 생중계로 지켜보면서 온 국민은 비극을 ‘체험’했다.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 따르면 그 비극은 한국 현대성의 산물이다. 즉,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현재 세월호 ‘이후’가 아니라 세월호 ‘안에’ 갇혀 있는 상태다.

  ‘한국사회는 이미 집단적 죽음 위에 건설됐고 개인적 죽음에 의해 유지·와해·붕괴되고 있다.’ 현재의 한국을 이룩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수많은 피들이 ‘제단’에 희생됐고, 매일 40여명의 개인이 자살을 하고 있다. 열흘에 세월호가 하나씩 가라앉는 셈이다.

바우만의 유토피아
  이러한 현실에서 바우만은 현실을 똑바로 보길 요구한다. 댐이 무너져 ‘쓰나미’가 밀려오는 상황에서 개인의 윤리, 공론장의 역할, 지식인의 역할 등을 다시 생각해봐야한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실천적인 투쟁을 통한 가치체계 확립이 요구된다.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아름답기만 한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우만은 유동근대에 ‘사냥꾼 유토피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사냥꾼은 최대한 많은 사냥감들을 죽이고 자루를 채우는 삶을 꿈꾼다. 혹은 사냥꾼을 꿈꾸도록 강요받는다. 거부하는 자는 대열에서 추방당할 뿐이다. 유토피아라기보다 차라리 디스토피아라고 하는 게 적절한 진단이다.

  기존의 것들과 다른 그의 ‘비전통적 유토피아’는 ‘판토피아(pantopia)’라고도 불린다. 미래에 존재할 초월적 전망이 아닌 ‘지금 여기’ 어디에나 존재하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멀리 내다보며 미약한 희망을 품는 건 바우만의 철학이 아니다. 누구나 참여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프로젝트를 꿈꾼다는 점에서 판토피아의 의의를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쓰나미가 지난 후, 모두가 죽지는 않는다. 산사람은 살게 된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한국은 우리가 알던 그 한국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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