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경일장(經一章)은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고 在親民하고 在止於至善이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이를 ‘삼강령(三綱領)’이라 하는데,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고, 지선에 머무르는 데 있다’는 의미다. 삼강령 실천을 위한 ‘팔조목(八條目)’도 대학에 있다.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대학은 방법론적 관점에선 미시적이고, 목적론적 관점에선 거시적이다.

 대학을 가리키는 영어 유니버시티(Uni-versity)는 ‘학생과 교수로 이루어진 학문공동체’인 라틴어 ‘우니베르시타스 마기스토룸 에트 스콜라리움(universitas magistorum et scholarium)’이라는 표현에서 유래됐다. 이는 사람으로 구성된 집단을 말하는 것이지 시설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뮤세이온’ 등에서는 걷거나 소요하면서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sche Anthropologie)’에 관해 논했다. 그래서 ‘사람이 미래다’라는 표어는 역설적으로 살인적이다. ‘미래를 여는 창’으로 대학을 선전하는 것에 하자는 없지만, 철학적 인간학이 초점이 아니면 두 번 죽게 된다.
 
 대학에 과연 어떤 학문이 필요한 것인가를 새삼 되새겨보면, 인간으로서 존재하면서 자신과 남을 이해하는 ‘인간학’, 사회에서 제대로 살 수 있는 지혜를 얻기 위해 사회를 이해하는 ‘사회과학’,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존재 근거로서 자연을 이해해야 하는 ‘자연과학’ 등으로 나눌 수 있고, 여기에 이들 간의 관계를 엮어야 하기 때문에 ‘관계학’이 덧붙여진다. 이들 모두는 ‘인간학’이 기반을 이룬다.

 대학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로 ‘학문의 자유(libertas scholastica)’가 있다. 근대적 의미의 학문의 자유는 ‘가르치는 자유(Lehr-freiheit)’, ‘배우는 자유(Lernfreiheit)’ 그리고 학문기관으로서의 ‘대학의 자치권(Frei-heit der Wissenschaft) ’등의 세 가지 개념을 담고 있다. 이 ‘학문의 자유’는 자유롭게 사고하는 ‘지적자유’나 ‘사상의 자유’를 포괄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 대학 사회는 어떤가. 대학은 상품화되었고, 자본에 굴복한 지는 오래되었으며, 불통은 이미 관행화됐고, 외부 평가에 속박당하고, 친기업학교로 전락하여 모든 교과가 기업 친화적으로 바뀐 지 오래다.

 이 사색의 결론은 이렇다. 다른 구성원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왜곡하려는 현상인 ‘프로크루테스의 콤플렉스’, 단기 실적에 급급하고 편향된 시각으로 인해 다양성을 상실한 ‘퀴클롭스 콤플렉스’, 자신만이 최고라는 생각의 ‘메두사 콤플렉스’, 마지막으로 과거의 장점까지도 모조리 단점으로 인식한 ‘다이달로스 콤플렉스’로부터 부디 빨리 해방되기를 염원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읊은 엘리엇. 그처럼 하버드 교수 자리를 뿌리치고 이국인 영국으로 건너가게 한 우(愚)를 지속적으로 범하려는가? 소통과 합의가 전제되지 않는 ‘학사구조 선진화 계획안’의 설익은 굿판을 이제는 걷어치워라. Oh! Quo Vadis.

남태우 교수
문헌정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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