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신문 이전호의 ‘오늘의 운세’ 코너에서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금의 실태를 인터뷰 형식으로 알아보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기사 하단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은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의 삶을 지나치게 간섭하는 도구로 돌아올 수도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말은 그대로 중대신문의 존재 이유의 문제로 확장하여 생각해 봄 직하다. 신문이라는 특성상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기본적인 초점을 맞추고 있겠지만, 정보를 선별하고 그에 대한 논평을 통해 중대신문만의 소신을 만들어갈 수 있다. 또한 신문은 많은 사람이 구독하고 읽는다는 것을 가정해야 하며 이에 따라 다양한 시각의 독자가 유입되므로 중대신문 나름대로 시선을 의식하며 기획할 수 있다.

 소신과 시선 사이. 핵심은 이 두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추느냐이다. 이전 호의 ‘친절한 기자들’ 코너 서두에 적힌 내용을 인용하자면 기자는 ‘독자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서 ‘기자라는 직책에 맞게 소위 팩트가 틀리지 않도록 사건의 정황을 신중히 설명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어떠한 사안이 발생하였을 때 기자와 신문은 사실에 의거하여 정황을 짚어내는 소신이 있어야 하고 그러할 때 독자 개개인이 갖는 시선을 아우르고 자유로울 수 있다. 이는 곧 신문과 독자 간의 신뢰로 이어져 소신과 시선은 통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중대신문은 소신과 시선의 균형을 통해 신뢰를 획득하고 있는지가 당면 과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중대신문과 기자들은 사실에 어긋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 나머지 사실을 알아가는 것에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자체의 소신이 모호하게 작용하고 있다. 사실이라는 것은 이미 발생한 그 자체로도 사실이지만 사실이 만들어지는 과정 또한 사실이고 앞으로 또 다른 사실로 발전해가는 양상 또한 사실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사안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현재에 함몰되어 과거와 미래가 단절되는 것은 반쪽짜리 사실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중대신문은 일간이 아닌 주간이므로 시시각각 변하는 사실의 양태를 짚어내지 못한 채 조각 하나하나를 기사화하는 것은 자신들의 소신과 논평을 약화하는 일일 뿐이다. 사실에 대한 몰이해는 결국 독자들의 시선 또한 분열적으로 접근되게 하므로 신문과 독자 간의 신뢰 구축은 먼일이 된다.

 이전 호의 ‘뉴스 모자이크’ 코너는 대학 신문들의 편집권 침해 실태를 다뤘다. 재미있게도 여기에서 중대신문에 대한 이야기는 한 줄도 없었다. 그렇다고 중대신문이 완벽한 자유를 가진다면 ‘신문 내기 참 어렵다’라는 말을 1면에 쓰지 않았을 것이다. 기획 기사에서조차 ‘사실의 힘’을 빌어 소신을 가지지 못하는데 독자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전덕원 동문
국어국문학과 07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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