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파트릭 모디아노 저/김화영 역/문학동네/271쪽
 
 어두운 거리를 정처 없이 떠돈다. 익숙한 곳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낯설다.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눈에 익은 풍경이 꼭 언제 한번 와 본 곳만 같다. 건물 벽에 드리워진 실루엣이 예전에 함께 거닐던 연인의 그림자 같기도 하다. 기억의 예술가 파트릭 모디아노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통해 망각된 기억의 낯선 세계를 돌아보게 한다.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70세 노인은 조각난 기억의 파편들을 가지고 어둡다 못해 음산하기 짝이 없는 상점들의 문을 두드린다.

영화 <내가 잠들기 전에>의 여주인공이 떠올랐다.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아침이 되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는 여성은,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자신의 모습을 매일 캠코더에 담는다. 잠드는 순간까지 하루 일과를 기억 속에 각인시키려 애쓰는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 가엾다가, 문득 어떤 원초적 물음에 봉착하게 된다. ‘과연 캠코더에 담긴 것은 그녀의 인생일까 아니면 조작된 다른 이의 인생은 아닐까?’ 라는 질문에.

기억은 늘 흐릿하다. 분명 처음 맞이하는 상황임에도 특정 장면이나 감각이 지나치게 낯이 익은 경험을 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이것은 단순한 기시감일까, 아니면 나의 온전한 기억일까? 소설 속 롤랑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자신의 흔적이라 추정되는 증거들을 얻게 될 때마다, 그것에 자신을 투영시킨다. 가령 낡은 상자에서 찾은 사진 속 젊은이를 자신이라 주장하는 것 같은 행동 말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애매하고 모호하지만 그 과정이 무의미한 과정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고 한 당신의 말은 옳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위트의 편지는, 어쩌면 현재와 미래를 만드는 것이 과거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기억을 통해 삶을 역사화하는 인간에게 과거의 기억은 정체성의 확인이자 자아탐색의 발로였을 것이다. 롤랑 또한 기억이 없는 자신을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로 죽은 인간에 비유한다.

사실 소설이 다루는 기억상실증은 롤랑 개인의 기억에 대한 ‘상실’이 아니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괴와 혼란의 시기에 대한 누군가의 의도된 망각이며, 전쟁이 없었으면 존재했을지 모를 순수한 시절에 대한 집단적 향수다. 모디아노는 전쟁이 끝나고 태어난 작가이지만 본명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이의 기억탐사과정을 통해 아버지를 비롯한 전쟁세대를 기억한다. 작가는 우리의 정체성이 이러한 전쟁의 폐허라는 불리한 환경에서 자란 것임을 역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득한 저 빛 속으로 쉽게 지워져 버리는 기억은 언제나 우리 삶의 도처를 떠돈다. 책은 롤랑이 로마에 있는 그의 옛 주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로 가며 기억 추적의 마지막 여정이 끝을 맺는다. 자신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단서로 향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는 결국 기억의 퍼즐을 완성했을 것이다. 만약 훗날 우리가 기억을 몽땅 잃어버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했었냐’고 울부짖을 날이 오게 된다면, 어두운 거리 위 상점들이 즐비한 곳의 문을 두드려 보자. 롤랑처럼 애꿋은 사진 속 남자를 가르키며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진 속 젊은이, 저랑 좀 닮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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