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는 일상이다. 생명의 최저선이고, 인간 존재의 기반이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끼니가 불러일으키는 슬픔에 대해 다음 같이 절절한 언어로 표현했다. “끼니는 어김 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다음 끼니를 건너 뛸 수는 없다. 모든 끼니는 반복되면서, 생명을 연장한다. 생명은 먹기 때문에 배설하고, 배설하기 때문에 다시 끼니를 걱정해야 한다. 이 평범한 사실이 인간 존재 자체를 성찰하게 한다.
▲ 일러스트 전은빈씨
특별한 맛집, 간절한 끼니들

매 끼니의 식사는 원초적 욕망이지만, 음식에 대한 취향은 문화의 영역에서 설명 가능하다. 주영하 교수가 『음식인문학』에서 이야기했듯이, ‘식사로서의 음식은 일상이지만, 문화와 역사로서의 음식은 인문학’이 된다. 음식을 문화적으로 접근하면 깊이 있는 사회문화적 해석이 가능하다. 음식문화를 통해 시대를 객관화할 수도 있다.

‘맛집’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의 즐거운 이슈인 ‘맛집’도 문화적이면서, 인문학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 우리는 급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맛집’을 찾지는 않는다. 배고픔은 근처 식당에서 시급히 해결하는 것이 상책이다. ‘맛집’은 끼니 해결을 전제로 하는 곳이 아니라 특별한 문화의 장소이다. 그곳은 일상이 아닌 기획된 시간이 투사된다. 그래서 동네나 주변에 있는 ‘맛집’은 간절함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동네 맛집은 쉽게 접근 가능한 끼니의 장소이고, 일상의 시간이기 쉽다.

‘맛집’은 미각을 전제로 한다. 맛집은 입 안의 감각이 요동치는 환희를 환기시킨다. 입에 주목해 보자. 입은 ‘말하는 입’, ‘먹는 입’이다. 이 신체 기관은 욕망의 원초적 통로이다. 말하는 입이 정치적 욕망의 상징이라면, 먹는 입은 생명의 간절한 욕망을 표상한다. 호흡하는 입은 숨결 자체이다. 밖의 것이 입을 통과하면 소화라는 육화의 과정에 이르게 된다. 내적 욕망이 입을 통해 발화되면, 정치적 관계가 형성된다. 그 중첩의 기관이 바로 입이다. ‘맛집’은 ‘먹는 입’이 먹은 것에 대해 ‘말하는 입’이 된다는 측면에서 중첩적이다. 이 복합적인 입의 양태로 인해 ‘맛집’은 중요한 문화적 논의의 대상이 된다.
 
훈육당한 미각들
한국에서 맛집에 관한 대중적 열풍은 생각처럼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은 ‘수요미식회’니 ‘먹방드라마’니, ‘맛집 칼럼’이니 하는 것이 일상이 되다시피했다. 인기프로그램으로 ‘삼시세끼’가 거론될 정도로 먹는 것과 연관한 프로그램의 확산은 대세를 이루고 있는 형국이다. ‘맛집’에 대한 대중적 열풍의 폭발적 확산은 2002년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허영만의 만화 『식객』의 영향도 크다. 하지만, 1990년대 초 일간신문의 증면과 문화·여행관련 기사의 확대가 이미 미디어로 재현되는 ‘맛집’ 확산의 길을 열어 놓았다.

‘맛집’은 미각을 위한 탐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행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맛집’이 항상 ‘탐방’과 연결되는 것도 여행 등 소비문화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맛집탐방’이나 ‘여행’은 과시적 소비나 이미지화한 자기재현으로 확산된다. 미디어를 통해 접한 ‘맛집’을 직접 방문해 이미지화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에 적극 동참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소비주체의 능동적 확산은 ‘맛집탐방’ 등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다른 의미에서 이는 자본주의적 권력이 인간의 육체 감각에 그 권능을 행사하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와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인간의 육체, 혹은 육체적 감각들이 통치와 관리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밝혀냈다. 인간의 신체는 권력의 메커니즘 아래 훈육당함으로써 새로운 육체로 재구성된다. 훈육당한 신체들은 때로는 순응하고, 때로는 저항한다. 권력은 일상에서 미시적으로 작동한다. ‘맛집’을 통한 소비자본주의의 확산도 복종과 저항의 유희적 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쾌락과 죄의식 사이의 금기음식들
‘맛집’이 표상하는 원초적 인간성은 입이라는 감각기관과 대비시키면 근원적 성격을 띠게 된다. 입은 항상 쾌락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입은 고통과 쾌락의 이중통로이다. 먹는 입의 반대편에는 굶주린 입이 있고, 말하는 입의 대척점에는 복종하는 신체가 있다. ‘맛집’에 집중해보면, 미각은 쾌락과 더불어 과식, 폭식, 음식고문과 같은 고통을 동반한다. 또한, ‘맛집’은 묘한 윤리적 신념을 환기하기도 한다. ‘맛집’이라는 용어는 낭비, 탕진의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그 반대편에는 검소, 절제가 있다. 이것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 같은 것이다. 부자는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음식을 섭취할 수 있다. 음식에 대한 낭비가 일종의 쾌락이자,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음식은 육체가 쾌락과 고통의 중첩이듯, 항상 금기를 동반한다. 모든 문화권에는 생명을 내걸고서라도 섭취하지 않으려는 금기음식들이 있다. 금기시하는 음식들은 문화적 상징이며, 종교적 신념의 상징이기도 하다. 힌두교는 소를,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는 돼지를, 게르만 민족은 문어를 금기시한다. 보편적으로 인류는 ‘식인’을 금기시한다. 이러한 금기가 인간에게 더 강렬한 위반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 윤리적 비극이기도 하다.

인간의 육체는 강렬한 자기보존 욕구를 지니고 있기에 능동적이다. 반면, 권력에 훈육당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순응적이기도 하다. ‘맛집’이 문화적이면서 인문학적 성찰이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맛집은 어떤 의미를 생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함께 먹는 끼니들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은 ‘맛집’ 이미지의 범람 속에서 자율적으로 자신의 미각에 충실할 수 있는가이다. 미디어의 재현에 휩쓸려 자신의 미각을 내맡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경험이 같아지고, 능동적 기쁨이 사라진 상태에 있는 ‘먹는 입’은 동물화한 입일 뿐이다.

시인 김선우는 『김선우의 사물들』에서 김훈의 ‘끼니의 곤란함’과 좋은 대비를 이루는 말을 했다.
“먹는다는 일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살아 있기를 희망하는 존재들에게 필연적으로 부과된 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존재의 치명적인 약한 고리이며 그리하여 먹는 일과 먹이는 일은 도덕적, 미학적 가치 부여 이전에 그 행위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진다.”

그렇다. 우리는 오로지 먹는 일만을 생각. 하기에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먹이는 일, 더불어 함께 먹을 수 있는 일을 생각할 때, ‘맛집’이라는 언어는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 낼 수 있다. ‘낭비와 과시적 욕망’에 포박된 맛집은 ‘공생의 정치’를 외면한다. ‘나만의 끼니’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하는 끼니’를 생각해야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은 공존할 수 있다
오창은 교수 
중앙대 교양학부 대학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